잡감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10년

빚진 마음이 무거운 탓일까?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사임 발표에 대해서 ‘잡감’을 적기로 했지만, 잘 안 된다. 때아닌 감기가 몸과 머리를 어지럽히고 이런 글쓰기도 부질없는 짓이라 타박하는 듯하다. 로완 대주교에 빚진 신학적 통찰력과 그분의 대주교직 수행의 불일치를 목격하며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 무거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편히 적으려는 데도 계속 힘이 들어간다. 힘을 빼고 그저 잡감에 충실해 보려 한다.

나는 10년 전 그분의 대주교직 지명에 기뻐했고, 그 전후로 그분의 글에서 깊은 배움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세계 성공회 전체에 닥친 분열의 위기 속에서 그분의 ‘치리’에 대해서는 다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그분의 글에서 읽는 신학자와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나는 여러 불일치와 모순을 느꼈다. 이런 내 느낌은 그분의 글을 내 멋대로 읽은 탓일 수도 있겠고, 교회 지도자가 처한 현실을 다 헤아리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분에 대한 배움과 오해가 어떻든, 그마저 내 시각에서 몇 가지 의문으로 정리하는 것도 또 다른 배움이 될 테다.

교회 일치, 그 빛과 어둠

성공회는 특별히 지난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의 산파였다. 성공회는 ‘개혁하는 가톨릭 교회’(a 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자신을 규정하는가 하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는 갈라진 서방 교회(천주교와 개신교)를 다시 잇는 ‘다리 교회’(bridge church)로 자신을 규정하곤 했다.

이 희망은 50년 전 마이클 램지 대주교의 말에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공회의 역할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캠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남들과 깊이 사귀는 밝은 하나의 색깔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확장하여 어떤 이는 “성공회는 ‘보편 교회’의 일치를 위해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이며,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 일치와 선교의 사명을 다할 뿐”이라고 비장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회 자신의 이런 선의와 비장한 마음과는 달리, 다른 교단, 특히 정교회와 천주교는 성공회에 확정적인 교리적 통일성이 없어서 그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자주 보였다. 이것이 교회 일치 대화의 걸림돌이라고 늘 단서를 달았다.

성공회는 적어도 19세기 말 이래로 ‘영국 성공회’라는 단일 체제를 떠나 지역마다 독립적인 관구 교회로서 자신의 전례와 교리적 가르침을 정했다. 다만, 영국 성공회 안에서 경험하고 발전한 신학과 전례의 기풍을 너르게 나누고 친교하는 것으로 ‘세계 성공회’가 살아간다. 단일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우리의 처지와 맥락에서 다양하게 만나는 하느님의 경험을 성공회 전통과 전례라는 기풍 안에서 서로 나누며 살아간다.

교회 일치에 대한 희망은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가시적 일치’는 환상이다. 갈라진 그리스도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하느님의 힘으로 ‘온전하게 될’ 일이지, 억지로 저마다 다른 맥락에서 발전한 여러 교회의 다양한 발전과 특성을 무시하면서 우리 힘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동안 교회는 일치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통해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양한 경험을 억누르기 일쑤였고, 그 조직적인 일치에서 얻은 힘을 함부로 부리곤 했다. 어쩌면 역사 속에서 일어난 교회의 큰 분열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었으리라.

그러니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저버리거나 소홀히 하는 교회의 일치는 종종 환상에 불과하다. 로완 대주교는 이런 환상에서 자유로우셨을까? 천주교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성공회와 천주교 간 일치 대화에서 성공회에 오래된 주문을 계속했다. 즉 성공회의 일치성을 보장해야만 양 교회가 일치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언뜻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일치의 실상은 무엇인가? 천주교 자신의 일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 획일적인 교도권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일치인가? 그 일치의 교도권 아래 억눌린 천주교 내의 다양한 목소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게다가 이런 와중에 여성 성직 서품과 동성애 문제에 관련하여 성공회를 떠난 그룹을 받아들이고, 성공회 내 보수주의자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교황청의 조치는 정말로 교회 일치에 도움이 되는가?

아마도 교회 일치에 대한 필요 이상의 집착이 로완 대주교의 패착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공회 계약’이라는 종이 문서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 내부에서도 그 ‘계약 문서’는 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죽은 말에게 채찍을 가하듯이, 이미 실효를 상실한 ‘계약’ 문서를 옹호하고 역설하시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영국 vs. 미국 – 제국주의와 소비주의, 개인주의

고정관념, 고정된 편견은 늘 사람의 시각을 왜곡한다. 미국 문화와 관련하여 더욱 그렇다. 영국의 몇몇 주교들은 미국 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놓았다. 적절한 비판이 많았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에는 늘 함정과 허점이 있었다. 현재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휘두르는 힘, 그리고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옳다 못해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미국’이라는 제국과 ‘미국 성공회’를 그대로 겹쳐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교회도 그 상황과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미국 성공회’는 미국이라는 전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적어도 그 기풍은 주류 종교 이념인 청교도주의를 거부하는 반문화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경계를 너무도 쉽게 무너뜨리고, 싸잡아서 비판하는 일은 옳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보다는 오히려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많은 독자를 거느린 신약성서학자 N.T. 라이트 전직 더럼 주교는 이런 태도가 뾰족한 분이었다. 미국과 ‘미국 성공회’를 그대로 겹치다 못해, 이제는 미국의 제국주의, 미국의 개인주의는 ‘미국 성공회의 제국주의’ ‘미국 성공회의 개인주의’로 펼쳐진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종교의 처지를 생각하면, 영국 사회의 세속화는 미국보다 더 심하다는 평이 많았다. 적어도 영국 문화를 걱정하는 건전하고 지적인 종교인들의 언급이었다. 남 말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왜 계속 ‘제국주의’ 비유에 빠져 함부로 남을 덧씌우는 것일까? 자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거나,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남 탓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정말 그런 심리에서 나왔을까?

아프리카 생각

로완 대주교는 아프리카에 대한 연민을 매우 자주 피력하셨다. 서방 국가들의 부와 힘이 아프리카의 질병과 가난과 극명하게 대비되곤 했다. 아프리카의 가난과 그 처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버릴 수 없이 소중하다.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교회를 볼 때는 더 세밀한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게다가 아프리카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아프리카 전체를 뭉뚱그리기도 쉽지 않다. 실상을 펼쳐보면 여러 아프리카 교회들이 아프리카 국가의 독재에 협력하는 일이 허다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과 부패, 그 권위주의는 하늘을 찌른다. 특히 이슬람과 종교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선교를 정당화하고, 사회의 소수자를 앞장서서 박해하는 이들도 대개 교회들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 대한 연민은 늘 선별적이어야 한다. 그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선교일 테고, 좀 더 적확히 말하면, ‘가난한 자를 우선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당파성’일 것이다.

세계 성공회 안에서 동성애 논란이 크게 번질 때, 로완 대주교의 처사는 썩 중립적이지 않았다. 캐나다와 미국 성공회에는 동성애자 서품 ‘잠정 중지’를 촉구하면서도, 아프리카 교회들이 다른 나라 성공회의 ‘치리 지역 침입’하는 것에는 별 조치를 하지 않았다. 교회의 힘을 업고 아프리카 여러 독재 정부가 추진한 동성애자 처벌법 등에 대해서는 오래 함구했다. 이 불공정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마저, 지난 ‘영국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아프리카에 대한 어떤 죄책감과 부채감의 발로일까?

‘글로벌 사우스’와 람베스 회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보수적 성공회 관구들은 소위 ‘글로벌 사우스’라는 이름으로 ‘리버럴’한 서구 교회, 특히 북미 교회에 반대하는 모임을 만들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계속 압박했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세계 성공회의 일치를 계속 위협한 이들이 아니었나? 세계 성공회의 일원이 되는 가장 중요한 문구인 “캔터베리 대주교와 나누는 상통”을 교회 헌장에서 삭제하고 자신들의 교세를 바탕으로 영구적 탈퇴를 위협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실제로 이들은 다른 관구 교회들과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10년마다 열리는 세계 성공회 주교회의인 람베스 회의를 보이코트하려 했다. 그 보수적 대표들이 따로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열었고, 람베스 회의 불참을 결의하고, 자기 관구에 속한 개별 교구 주교들의 참석을 강제로 막았다. 교회 분열은 누가 일으키고 있는가?

그러나 더 많은 주교가 람베스 회의에 참여했다. 직접 목격했던 충격스러운 일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캐나다와 미국 성공회를 징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주교가 집전한 람베스 회의 개회 성찬례에서 영성체(communion – communication)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인데, 이야말로 자기 파문(self-excommunication)이 아닌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람베스 회의를 기획하고 이끈 로완 대주교의 지혜는 겸손하고도 출중했다고 생각한다. 인다바 그룹을 통해서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누고 귀 기울이도록 하는 일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 경청 과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누구에게 ‘귀를 기울일 것인가? 주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 그 경청 과정이 완료되는가? 그들이 성공회 신앙인들을 대표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 일들이 세계 성공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귀 기울일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교회 일치와 여성 성직

세계 성공회의 절반은 여성 성직 서품을 시행하고, 나머지 절반은 반대한다. 세계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 시행 역사에서 ‘영국 성공회’는 늘 뒤처졌다. 1993년 여성 사제 서품이 가능하게 되고, 여러 논란 끝에 2014년이면 여성 주교가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는 이를 반대하는 보수파들이다. 이 보수파들은 ‘성공회-가톨릭’이라는 전통을 아주 협소하게 이해하는 이들이라 하겠는데, 이미 그 무리의 절반은 1993년 영국의 여성 성직 서품 이후로 천주교로 건너갔다. 그런데 몇몇이 남아서 여전히 여성 주교직도 반대한다.

로완 대주교는 여성 성직 서품을 찬성하다 못해 적극 후원하는 분이다. 로마에 초청받아 전하신 강연에서도 당신의 이런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소위 ‘영국 성공회의 일치’라는 이름 아래서 이 보수적 주교들과 교회를 달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즉 1993년 여성 성직 서품 이후 만들어진 ‘플라잉 비숍’(flying bishop) 제도를 더욱 확대하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혹시라도 여성 주교가 선출되면, 그 교구 내에서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신자, 교회가 교구 밖의 다른 ‘남자’ 주교의 치리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명백히 주교직에 대한 이해를 훼손하는 일이다. 실제로 로완 대주교는 요크의 존 센타무 대주교와 함께 여성 주교직과 관련된 치리 문제 개정안을 제출했다. 관구 의회는 두 대주교의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결국, 이로써 두 대주교는 자신들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었다. 역시 일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패착이었다고 본다.

희생의 대가

성공회는 어떤 신학적인 ‘문서’를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구획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례와 선교의 경험 안에서 만나고 나누는 행동으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이해하려 했다. 하느님의 손길은 그런 공동체와 선교의 경험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로완 대주교는 ‘성공회 계약 문서’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계약 문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소위 ‘리버럴’을 좀 누르면서 보수파를 달래려는 방법이리라 기대했겠으나, 리버럴은 물론, 보수파도 ‘계약 문서’를 반대했다. 오히려 보수파는 세계 성공회의 분열 책임을 로완 대주교에게 돌렸다.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곧 사임하겠다는 발표에 대해서 나이지리아 관구장의 첫 반응은 모욕과 욕설이었다. 세계 성공회 분열이라는 역사에서 로완 대주교는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존재로 기억될 것이라는 험담을 늘어놓았다. 로완 대주교는 누구를 감싸 안으려 했던 것일까? 자신의 친한 친구이자 동성애자인 사제가 영국의 한 교구 주교장직에 지명되었을 때, 그를 설득해서 주교직을 포기하게끔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치를 위한 희생의 대가는 무엇인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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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들과 더불어 로완 대주교 10년 세월을 따라왔다. 그분의 책과 글에 드러난 놀라운 영성적, 신학적 식견에 감복하고 찬탄하면서도, 그것이 교회 치리와 행정과 엇나갈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분의 여러 글을 조각으로나마 읽고 복기하고, 번역하여 다른 이들과 나눈 기쁨이 컸다. 전례력에 따라 발표되는 그분의 편지를, 하던 일 다 제쳐두고 냉큼 번역하여 퍼뜨리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그러나 교회와 관련된 그분의 처신은 내 기쁨과 즐거움을 짓누르곤 했다.

연말에 어느 분이 대주교로 지명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분이든 내게 로완 대주교의 지명 때와 같은 흥분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 말하는 것이 그대로 원고인 그분의 탁월한 지성은 그나마 남아서 성공회 신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시리라 기대한다. 그 높은 지성과 지위에도 늘 겸손하게 행동하셨던 분으로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고집불통처럼 ‘보라색’ 성직 셔츠를 한 번도 입지 않으신 분. 주교라면 뽐내고 싶을 주교 장백의의 꽃 소매 장식을 한사코 마다하신 분. 성공회를 대표하는 대외적인 일이 아니면 되도록 ‘보라색’ 캐석도 입지 않으려 하셨던 분. 람베스 회의 공청회장 뒤쪽에 남몰래 쭈그리고 앉아 찜통더위 속에서 연신 손부채를 하시며 경청하시던 분. 그러고 보면 이런 불평어린 잡감이 초라하여 그분에 누가 되지 않나, 잠깐 생각했지만, 크신 분이기에 그럴 리는 없겠다.

그분의 부활절 메시지는 아마 우리말로 번역할 것이다. 올 성탄절 메시지는 그분이 내실까? 아니라면, 또 다시 번역하게 될까? 지난 10년 동안 로완 대주교의 절기 메시지를 거의 다 번역했으나, 이 일도 올해로 그쳐야 할 성 싶다.

19 Responses to “잡감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10년”

  1. Paul Jongweon Lee Says:

    우연히 신학교 도서관에서 On Christian Theology를 발견하고선, "한번 읽어나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신학도 따뜻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지요. 그후로 몇 권 더 빌려 보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지식과 지혜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주교님에 대한 신부님의 애정과 존경이 가득 담긴 이 글이 그때 느꼈던 제 설렘을 상기시켜주네요.

    [Reply]

  2.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제도 종교와 영성이 충돌할 때 Says:

    [...]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적은 바 있거니와, 그분의 놀라운 영성과 지성이 세계 성공회 안에서 [...]

  3. Mike Says:

    글쎄요. 예수님 께서는 결혼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말씀하셨고 나눌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혼은 예외적인 경우로만 허용하셨고 그 외는 간음이라고 하셨죠. 이것이 주님 말씀의 결혼과 성에 대한 선포 입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주님의 아버지의 사랑은 충분히 나눌수 있고 그들 역시 영국이나 독일이나 프랑스 처럼 civil partnership 으로 결혼과 같은 권리를 줄순 있겠지만 그건 결혼 은 아닙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에서도 동성애는 있었지만 그건 결혼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꼭 결혼에 얽매일 필요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적 완전한 자유 – 이게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인지는 모르겠으나 – 를 원한다면 전통적인 ‘결혼’에 얽매이거나 파괴하지 말고 프랑스 대통령과 그 연인이 하는 것처럼 pacs를 할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동성애자들의 성이나 전통에 대한 입장에 봤을때 타당한 것이고 다른이들도 make sense 할수 있는 것이죠. 물론 성경적인 입장에서는 물론이고요.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죄라고 수차례 명확하게 말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들이 내세우는 성경적 근거들은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아전인수식( 문맥상 동성애로 결론내리기 어려운) 논리인 경우가 많았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성애자를 주교로 세우는 일은 분명히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간음을 일삼는 이를 주교로 세워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것이 성경적인 결론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자신을 예수님과 사도들과 똑같다고 여기는 것이며,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거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죠. 곧, 이단이요 반 그리스도, 반 사도적인 겁니다. 이는 어떻게보더라도 명확하며 그러기에 동성애자들을 인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죄 자체는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공공연하게 승인해 주거나 그걸 가지고서도 주교의 자리에 오를수 있다고까지 공공연하게 승인하는건 예수님과 사도들과 선지자들 – 교회의 토대 – 가 선포한 도덕을 완전히 파괴해서 자신의 종교를 창조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건 다릅니다. 그리고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걸 존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이 아니라 그냥 ‘명상주의자’ 라거나 ‘종교인’에 불과하다면 그거야 자신의 자유겠지만.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는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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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ike Says:

    종종, 성경을 파괴하고 이런 성의 무제한적 자유를 말하는 이들을 바라보면 왜 이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며 교회 안에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냥 명상센터를 만드는게 그들의 영성에 더 부합할 텐데요. 이들은 예수를 따르는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자아를 따르는 이들이 아닌지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멀리 가 버린 이들.. 그들은 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뱉어버리면서. 성찰과 개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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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ike Says:

    한가지 덧붙인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있어 전통이란 하나의 보조적인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전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뒤엎는” 행동은 분명히 반대하셨다는 겁니다. 전통과 이성은 사도적 신앙을 읽었던 방법과 경험이지 성경을 뒤집어 엎고 자의적이고 자신만의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도구는 아닙니다. 사도적 전승과 복음은 성경에서 완성되었고 전통은 그것을 잘 이해할수 있게 하는 연결된 좋은 방법이지 본체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수단은 결코 될수 없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내용 입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를 공적으로 지지하고 성윤리를 토대부터 파괴하는게 예수님의 뜻은 아닙니다. 어떻게 읽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입장에서 그건 이단입니다. 그냥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일이죠. 본질적으로 크게 본다면 신천지의 사고방식과 별로 다를바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그들만의 몰몬교를 만드는게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건 진정한 중도의 길이 아님도 분명합니다. 중도는 시대에 그저 야합해 버리는 중간점 찾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런점에서 동성애자는 얼마든지 교회에 들어오게 할수 있고 환영할수있지만 동성애를 조장하고 그걸 완전히 찬성하거나 주교로서 이를 공인하는 건 어떻게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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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ike Says: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결코 아니며, 이는 심지어 교회의 해석권을 지나치게 강조해 나가 버리는 로마 가톨릭 조차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교도권은 이미 주의 말씀으로 포괄적으로 계시된 진리를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해석’하는 일이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라고 말이죠. 우리의 임무는 주의 뜻을 이땅에서 fresh 하게 이뤄가는 거지 새로운 계시를 창조해 내는 건 아니죠. 그건 신흥종교일 뿐입니다.

    [Reply]

  7. Mike Says:

    요컨대, 그리스도교 교회 에서 누구도 전통을 성경을 뒤엎는 요소로 보지 않는 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성경을 더 밝고 명확하게 보는 용도로 보죠. 이것에 반대한다면 신천지나 몰몬교 처럼 신흥종교를 만들면 좋을 일입니다.

    [Reply]

  8. fr. joo Says:

    Mike / 의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논란이 많고 여러모로 여전히 연구 중이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Mike 이 펴신 주장에서 그 마음은 헤아리겠으나, 그 주장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나 논리는 적절하지 않거니와, 너무 일방적이어서 제가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빕니다.

    [Reply]

  9. Mike Says:

    제 의견에 대한 답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죠.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어느정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다수가 이러한 의견에 동의 합니다.

    그저 아니라고만 하면 알수가 없으니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건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대다수 크리스천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로서도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fr.joo 님의 의견이 별로 타당성이 없다는 점은 누구나 알수 있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수년간의 수많은 토론과 연구 끝에 나온 결론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ply]

  10. Mike Says:

    fr. joo 님의 포지션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주장도 이해는 갑니다만,

    좀더 마음을 열고 이 사안에 대해서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fr. joo 님의 의견은 그냥 다른 종교를 세우자는 의견에 다름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를 빕니다.

    [Reply]

    fr. joo Reply:

    Mike / 연이은 댓글 고맙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님의 주장이 일방적이니 제가 보탤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마음을 열고” 라는 주문은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부탁입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대로, Mike 님의 종교와 제 종교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고맙습니다.

    [Reply]

  11. Mike Says:

    상호 대화와 소통을 위해서는 생산적인 토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근거 없이 상대방의 주장을 일방적이라고 하는 태도는 합리적인 대안찾기에 도움이 되지 못하죠.
    그런점에서 fr. joo 님은 토론과 대화를 회피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제적인 의견 교환이 오간다면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할수 있음에도 그냥 신학적 견해가 다르다는 말만 하시니까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fr. joo 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 가 아닌것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취해 물러 터진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닌 자신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 놓진 않으셨나요. 그건 사랑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가 마음을 열고 대화에 임한다면 더 나은 결론을 마련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상대방이 일방적이라고 해버리면 대화는 단절되고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집니다.
    거룩하시며 참된 사랑이신 주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길 바라며..

    [Reply]

  12. Mike Says:

    동성애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기에 해결을 위해서는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사안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수반되야 합니다. 참된 화해와 평화는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나올수 있습니다. fr joo님의 신학적 발전을 기원 합니다.

    [Reply]

  13. fr. joo Says:

    Mike / 다시 의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기하신 문제에 대한 제 의견은 이 블로그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님의 질문에 대한 제 생각도 그 안에 대부분 들어 있습니다.

    제가 더 보탤 말이 없다고 한 것은 님께서 명확하지 않은 논지 뒤에 자신의 결론과 확신을 먼저 내려놓고 ‘힙리적인 대안찾기’를 요구하는 탓입니다. 우둔한 저는 이 대화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님께서는 이미 제 신앙을 ‘다른 종교’라고 계속해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신의 판단 안에서나마 ‘참된 화해와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Reply]

  14. Mike Says:

    저는 fr. joo 님의 블로그에서 좋고 유익한 내용들을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 동의할수는 없었고 그래서 저의 부족하나마 진솔한 의견을 드린 겁니다.

    저도 처음부터 어떤 한 입장을 정해놓고 시작한게 아니라 다빈치 코드와 예수는 없다, 예수는 신화다를 접하게된 이후로 그리스도교의 위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수많은 노력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칼 바르트와(하지만 칼바르트는 일반은총과 특수은총론과 구원론에서 다들 인정하다시피 상당한 억측과 실수를 범했고 그건 비판받아야 하겠죠. ) 거기서 좀 더 발전한 톰 라이트의 신학의 좋은점을 결합한 쪽으로 발전했습니다(그분들도 무조건 옳은건 아니기 때문에 총체적인 방향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더라도 큰 견지에서 그리스도교 정통교회에서는 이러한 신학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가지게 됬습니다. 그것이 사도적 복음이 말하는 바 이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말하는 바 이며 종교간 존중과 협력과 대화를 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중심을 확고히 잡아 나아갔던 요한 바오로 2세 같이 현명한 교회 지도자 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는 성경적 입장이며 사도적 전승의 확고한 입장입니다. 이는 성공회가 지금까지 공적으로 지속적으로 이어 왔던 입장이기도 합니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의 신학적 입장은 최소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 교회가 아니기에.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도 교회의 수장으로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을 겁니다.

    저는 주낙현 신부님의 깊이있고 성숙한 태도에 상당부분 공감하면서도 누가보더라도 ‘이건 아닌데 하는’ 입장으로 나아가시는 데 대해 비판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다 알수 없는 분이시고 그 초월적이고 편재해 계시는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은총의 문을 여셨다는 게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진리에 우리 자신을 담궈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른종교의 일반적으로 좋은 점을 존중하고 배울수 있고 평화롭게 살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도 말했듯이 우리의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복된 선교를 잊지 않을 겁니다. 그건 교회의 생명이자 존재 이유고 참으로 영원한 구원과 부활로 이끄는 길 이기 때문입니다.

    [Reply]

  15. Mike Says: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에게서 배울점을 배우고 존중하고 평화롭게 지낼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를 한 이웃이자 시민으로서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의 주장 모두를 그냥 받아들이고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인간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보다 더 높고 크십니다. 인간의 작은 눈으로 크신 하느님을 오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한해서는 안되죠.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안에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것 이게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일 겁니다. 물론 저야 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하고 여전히 제가 알수 있는 부분을 설명만 하고 있지만요. 참으로 복음적인 하느님을 잘 아는 사람은 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걸 저는 주위에서 봐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이런 학문적 입장이나 어떤 신비주의적 설명도 별로 필요하지 않죠.

    그냥 그분들은 자유롭게 하느님을 알고 자유롭게 살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 입장이 그저 불필요 한건 아닙니다. 학문적 입장이 없다면 오래지 않아 모든게 온통 흐려질 겁니다. 모호함은 필요하지만 모든게 모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Reply]

  16. Mike Says:

    그래서 모호하게 해야 할 것과 분명히 해야 할걸 잘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Reply]

  17. Mike Says:

    모든게 모호하다고 여기는 입장은 어떤 발전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Reply]

  18. fr. joo Says:

    Mike / 연이온 충고 고맙습니다. 다만, 저는 그 ‘모호한’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조언하신 ‘발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제가 ‘발전’하는 길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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