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잡감 1 – 성직자와 평신도
성소 주일을 안내하는 공문과 공동 설교문이 바다를 건너 눈앞에 펼쳐진다. 늘 9월에 지키던 관행을 버리고 4월 말 성공회대학교 설립일 언저리 주일로 옮겼다는 것과, 올해는 마침 부활 4주일 ‘착한 목자 주일’과도 뜻이 통하며, 연합 미사가 아닌 개별 교회에서 지키기로 했다는 안내다. 딸려 온 공동 설교문은 서품받은 성직자들과 미래에 서품받기 위해 훈련하는 신학생들에게 맞춰져 있다. ‘잠깐만!’ 하며 생각을 더듬는다.
성소(聖召)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일 텐데, 그 부르는 주체는 하느님이시요, 그 부름의 내용은 새로운 약속을 받고 그에 다른 임무를 얻어 새로운 길을 떠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성소를 이끄는 주체와 내용은 분명하되, 그것을 듣는 대상은 모호하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라고 하셨다. 모세는 불타도 사그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히브리(합비루)들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는 지도자이지, 제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사장직은 모세의 형 아론의 몫이었다. 아론에게 어떤 거룩하신 부르심의 경험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나이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듣지 못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적어도 하느님의 부르심과 제도적 성직은 별개일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성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대사제로 유형화한 것은 신약성서 히브리서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유형화를 확대하여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그 제자의 계보 속에서 성직의 위계와 그 의미를 덧붙였다. 이 유형론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 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본래 ‘성소’의 의미를 매우 위축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제를 ‘제 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부른 해묵고 허황된 주장이다.
성소의 본래 의미를 한편으로 좁게 해석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좁게 해석된 의미를 과대평가해서 나온 행태가 바로 성직자주의(clericalism)이다. 이 성직자주의는 교회를 망치는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아우른다. ‘주님의 종’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수사 뒤에는 온갖 관료주의와 독재가 판을 친다. 소위 ‘만인사제론’으로 불리는 ‘신자의 보편적 사제직’을 강조하는 ‘한국 개신교’에서 오히려 더 못된 독재자가 나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이런 뿌리 깊은 왜곡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성직자의 성소에 맞춰진 한국의 ‘공문과 설교문’은, 평생 ‘평신도 사목자’로 식별하여 헌신한 앨다 모건 박사(Dr. Alda Morgan)의 인터뷰 기사와 겹친다. ‘앨다’와 나눈 사적인 인연과 훈훈한 경험을 세세히 적을 필요는 없지만, 통찰력 있는 교육사학자요, 따뜻하고 지혜로운 사목자로 그를 기억한다. 이번 인터뷰를 읽기 전까지는 그의 ‘성소’와 그 내력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내력도 내력이려니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고민하고 도전하는 그의 메시지가 무척이나 뼈 아프다. “1976년 미국 성공회 관구 의회에서 여성 성직 서품이 통과된 후, 나는 답을 얻었다. 성직자의 교회 안에서 평신도 전문가로 남는 것.”
나는 여성 성직, 특별히 세계 성공회와 한국 성공회에서 여성 성직의 실행을 마음 깊이 지지하거니와, 좀 더 넓혀서 성소 식별의 문제,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 사제직, 그리고 서품받은 제도적 사제직, 사제 양성 문제를 사적인 공부와 고민의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이 틈에 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소에 대한 좁은 이해와 성직자주의라는 현상,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다.
모건 박사는 젊은 시절 미국 성공회 내 여성 평신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계속된 식별 속에서 평신도 사목자가 그의 성소인 것을 알았다. 당시 미국 성공회 본부의 지원 속에서 여러 여성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회고한다. 많은 여성이 교회의 신앙 교육자로, 사회 선교 단체의 일꾼으로, 그리고 학원 선교의 담당자로 일했다. 그런데 여성 성직이 실행되면서 일대 변환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여성 평신도 사목자들이 하던 일을 모두 여성 성직자들이 맡게 되었고, 여성 평신도의 활동은 위축됐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 성직자들은 그의 좋은 친구들이었고 훌륭한 사제들이었다.
모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 성직 서품 후] 교회 안에서 여성이 지도력을 얻게 되었다. 교회 언저리에서 돕는 일을 하다가 성직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서 정말로 많은 측면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너무 오래 지체됐던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성 성직 서품은 평신도 여성이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봉사할 길을 막아 버렸다. 기이하게도, 여성이 자기만의 조직을 꾸려가야 했던 때에는 다양한 여성 활동 단체를 통해서 서로 돕고 응원하는 공동체의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안 보인다. 과거를 돌아보니, 우리가 가졌던 그 열정과 활력, 그것이 너무도 아쉽다.
자주 밝힌 바 있거니와, 남성으로서, 그리고 상대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사제가 된 사람으로 여성 성직에 대해서 이런 말을 전하기가 참으로 미안하다. 여성 사제 서품에는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분투했던 많은 여성과 여성 성직 후보자들의 땀과 눈물이 흥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적 사제직으로 서품받은 한 사람으로서, 성직자라면 쉽게 물들기 쉬운 성직자주의의 위험,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평신도 성소와 사목의 축소 등을 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이는 이제 여성과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의 문제이다. 이 부분에서 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 사안은 교회를 여러모로 위태롭게 하는 사단이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