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잡감 2 – 성직자주의의 그늘

의도했든 안 했든 교회의 문화가 성직자주의로 미끄러지면, 성소에 대한 이해도 어긋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바른 관계를 세우기도 어렵다. 그 결과 교회는 선교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내부 혼란으로 기력마저 쇠진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왜곡된 이해와 관계를 바로잡기가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평신도’라는 말은 적어도 어떤 계급적 질서를 염두에 둔 용어이다. 그저 ‘신자’라고 하면 될 일이지만,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 어느 주교님은 굳이 ‘평신도'(lay people)라는 말을 쓰지 않고, 늘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고 그리 쓰기도 한다. 어쨌든 왜곡은 왜곡대로 인정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잡감에서는 여기저기서 ‘신자’와 ‘평신도’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다.

성소와 교회의 실제 사목과 관련하여 한국 성공회에는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잡감이라 이름 붙였으니 순서나 논리적 연계 없이 떠오르는 일 세 가지를 예로 들어 적어 보려 한다. 첫째는 성직자의 증가에 따른 평신도 사목의 축소 현상이요, 둘째는 ‘자급 사제’로 오해되는 ‘명예 사제’ 서품 관행, 셋째는 성직자와 신자의 힘 겨루기이다.

1. 성직자의 증가에 따른 평신도 사목의 축소 현상

언젠가 시골 교회 사목 경험이 풍부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특히 신자들의 교회 참여와 전례에 대한 참여에 관련한 이야기였는데, 그분이 들려준 고민이 이채로웠다. 예전에는 성직자가 모자라서 시골의 모든 교회를 돌보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 있는 신부님이 주일에만 성찬례 집전을 하러 오후에 오시고, 주중이나 토요일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저녁기도(만도)를 바쳤다고 한다. 물론 이 예식에서는 평신도가 ‘사식자’이다. 이런 만도, 혹은 매일기도 전통이 적어도 평신도의 지도력으로 시골 교회에는 나름 뿌리를 내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직자 수가 늘어서 작은 교회에도 파송되어 오고, 모든 전례를 성직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신자들도 전례와 예절은 모두 성직자의 몫이라 당연시했다. 굳이 성직자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매일 기도(성무일도)도 모두 성직자 몫이 되었다. 그런데다 매일 기도 전통도 차츰 사라졌다. 매일 미사를 드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사는 사제 아니면 집전할 수 없다. 자연스레 신자는 매우 수동적인 출석자, 전례와 사목의 방관자가 되었다.

전례와 다른 예배에서 신자들이 전례와 사목을 이끌 자리를 잃은 대신에, 신자들은 그 본연의 일을 할 수 있다고들 기대하기도 했다. 전례는 성직자에게 맡기고 신앙생활과 다른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상은 현대 사회의 직업주의, 혹은 전문화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신자는 전문가가 아니니, 전문가인 성직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방관자가 되면 된다. 신자가 참여할 수 있는 사목직이 있었으나, 이제 ‘풀타임’ 성직자가 있으니, 그가 모든 것을 맡으면 된다.

이 과정에서 신자는 참여자에서 벗어나 구경꾼이 되기 쉽다. 구경꾼의 특징은 종종 꼬투리를 잡는 것. 자신이 할 때는 안 보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허점이 보이는 법이다. 이러면서 성직자에 대한 요구 사항과 불만은 늘어간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이는 주인의식의 상실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불만과 요구는 박탈당한 주인의식을 되찾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성직자도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굳이 성직자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모두 나서서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일은 점점 많아지고, 여유로운 기도 생활보다는 탈진 상태가 속출한다. 그리고 이마저도 성직자의 운명이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피로가 쌓인다. 그런데 이 피로 상태로 신자들과 새로운 사목을 여는 일이 쉽지 않다.

2. 성직의 혼란 – 자급 사제, 명예 사제

한국 성공회는 지난 십 여년 동안 세계 성공회 역사에 놀랄 만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다행히 그 기록이 한국 성공회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서운할 정도다. 매우 냉소적인 표현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몇몇 기이한 사건이 성직을 둘러싸고 일어난다는 점에서 염려가 크다. 소위 ‘자급 성직’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실제로는 그 개념이 혼란스러운 성직 서품 관행이다. 서술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명예 성직’이라는 말이 그나마 정확한 표현이겠다. ‘자급 사제’는 말 그대로, 사제이되, 교구나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신이 손수 생활비를 마련해서 생활하는 사제를 말한다. 아내 등을 쳐서 먹고 살면서 교구나 교회에서 전혀 사례비를 받지 않는 내 경우도 ‘자급 사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관행에는 나름 좋은 뜻도 있다. 즉 성직 성소를 식별한 신자 가운데서 그 신앙의 경륜과 지식, 그리고 교회를 향한 헌신을 깊이 인정하고, 한정된 영역에서 전문적 사목을 할 수 있도록 성직을 서품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특별 과정이 있다는 것인데, 일반적인 성직 서품 과정인 성소 식별 과정, 신학 훈련, 사목 실습 및 필요한 기간을 전혀 달리해서, 이 모든 것을 축소한 ‘단기 코스’다. 물론 사목 활동에 대한 제한도 두었다. 그러나 성직(부제, 사제)으로 서품되면 그냥 부제요, 사제이지, 그 앞에 다른 말을 붙일 수 없는 법이다. 성직은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일을 천연덕스럽게 계속하고 있다. 교회가 정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에 함부로 예외를 둬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랜 경험과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모순되는 사례를 법제화하면, 교회는 그 일관성과 권위를 조금씩 잃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사회 선교 단체에서 일하는 신심 깊은 이들을 종신 부제직에 서품하자고도 한다. ‘종신 부제직’은 또 다른 사안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성직이므로 성직 성소 식별 과정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에는 성직 성소 식별보다는 그 사회 선교 단체 활동의 편의를 위한 목적이 앞서는 일이 많다. 이는 그저 안타까운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성직에 대한 신학이 우리 교회에 빈곤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은 이런 문제 제기를 사석이나, 잠시 마련된 공론의 장에서 여러 차례 던졌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성직자주의의 뚜렷한 부작용이다. 성직 성소 식별을 위한 일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좀 더 쉽게 성직자가 될 길을 열어 놓는다는 생각에 물어야 할 단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왜 굳이 성직자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가능한 대답에 문제의 요인도 있고 해결책도 있다. 성직자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성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고, 신자로서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실제로 성직자가 여러 일을 독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결 방법은 그 사목을 함께 나누는 길이요, 이른바 “세례받은 신자들의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의 교회를 만드는 길이다. 바란다고 더 많은 성직자를 만드는 일로는 교회의 위계화만 심해진다. 또 그에 따른 권위주의가 깊어지는 만큼, 성직자의 실제 권위는 얕아진다. 성직 소명 식별이 분명하다면, 일반적인 과정을 따르면 된다. 성직의 길에 예외를 만들면 중세 교회 꼴이 난다. 그 탓에 현대의 많은 건전한 교단은 이 길에 예외를 거의 두지 않는다.

3. 성직자와 평신도의 힘겨루기

다시 말하거니와, 성직자주의는 성직자가 갖는 권위를 하나의 권력으로 휘두르는 현상을 말한다. 성직자에게는 교회가 부여한 권위와 권한이 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이 권위가 흔들리면서 이를 지키기 위한 자기 보호 본능이 발동한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가 정당한 근거 없이 도전받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도 어찌 보면,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하던 성직자주의 문화에 대한 신자들의 무의식적인 반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 반응과 반작용은 어느 쪽에서도 건강한 결과를 내지 못할뿐더러, 머지않아 교회를 깨뜨린다는 점이다. 이때 어느 한 쪽이 눈을 감고 참으면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태는 거짓 평화이다. 어느 한 쪽이 떠날 것을 서로 기대하는 불행한 평화이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의 실상이요, ‘수준’이다. ‘수준’을 운운하면 ‘욱’ 하고 덤벼들 분들이 우리 교회에 여럿인 것도 잘 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게도 심각한 ‘수준’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수준에 우리 자신 모두가 못 미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덮어두고 서로 불평할 일이 아니다. 수준을 높이려면 서로 불평하고 힘 겨루는 일을 그만두고, 그것을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의 수준에 대한 요구 사항은 사실 성직 서품 예식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보탤 말이 없다. 다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계속되는 기도와 공부에 기초한 신학하는 권위, 그리고 교회가 성직자에게 배타적으로 부여한 전례 거행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성공회 성직자가 바탕을 둬야 할 두 권위이다. 이 권위가 작동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자신이 따라야 할 권위를 바로 찾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성직 서품 이후에도 계속되는 성직 성소의 핵심이어야 한다.

신자가 갖는 권위는 우리 교회의 전통과 신학, 그리고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성직자의 권위를 따르며,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선교적 가치에 맞추어 실천하는 데 달렸다. 적어도 성공회 신자라면 성공회의 전통과 신학을 존중하며 배우고, 성직자가 교회에서 받은 공적인 권위를 인정할 때, 신자의 영성도 깊어지고 신자의 권위도 선다. 자기 개인의 신앙적 내력과 유산은 교회의 바른 권위와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 배울 때 더욱 풍요로워진다. 결국, 신자의 성소 식별은 이런 풍요로움을 위해 자신의 은사와 성소를 알아차리고 그 부분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어떤 신자들은 세속 정치에 대한 성직자들의 발언을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한다. 소위 ‘정-교 분리’라 부르는 정치와 종교의 불간섭 원칙을 내세운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세속 정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정교분리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정교분리 원칙은 대단히 미국적인 맥락에서 나온데다, 원래는 종교적인 교리를 세속 사회에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적어도 성공회 안에서는 ‘정교분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여 쓰지 않으면 성공회 전통에 대해 무지한 것을 금세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만다. 성직자가 성직 성소를 식별하며 교회에서 받은 권위에는 공동체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와 더불어, 복음의 가치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가 그 권위의 책임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신자들이 계속해서 성직자와 힘겨루기를 하면, 역설적이게도, 결국 교회가 정치판이 되고 만다. 이런 정치판이 사실 교회를 망친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의 염려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런 말이 흔히 떠돌았다. 4세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대주교가 한 말이라 전해진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사제들의 해골이 깔린 포장도로요, 주교들의 해골은 그 이정표라네!”

교부 자신이 이 경구를 발설했을 법하지는 않다. 아마 단테가 지은 <<신곡>>의 영향, 그리고 실제로 존 웨슬리가 크리소스톰 대주교가 한 말이라고 부정확하게 인용한 탓에 퍼진 말일 테다. 실제로 요한 크리소스톰 대주교는 당시 교회 현실을 두고 자주 개탄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 성당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 수많은 신자, 성직자 가운데 구원받을 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천 명 가운데 백 명도 안 될 겁니다.” 그 맥락은 당시 만연한 성직매매와 같은 교회 부패, 그리고 신자와 성직자 모두 연루된 교회 내 불화였다.

성직자나 신자가 자신의 성소 식별을 정확히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바른 힘의 균형이 깨진다. 이런 참에 더욱 서로 대화하고 서로 배우지 않으면 교회의 선교는 물론이요, 교부 성인이 염려한 대로 구원에서도 멀어진다.

2 Responses to “성소 잡감 2 – 성직자주의의 그늘”

  1. 차요한 Says:

    성소주일을 맞으며, 사제서품을 앞두고, 진지한 마음으로 신부님의 글을 읽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제 고민의 한 거울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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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차요한 / 반갑습니다. 지적한 내용이 실제로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사제 서품식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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