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 속의 경계인

오래도록 벼려왔던 <경계도시 2>(2009)를 혼자서 봤다. 중요한 논의를 위한 전화 대기 상태의 무료함을 이기려 내린 선택이었다. 우선, 뛰어난 다큐멘터리. ‘경계인’의 삶과 선택, 그런 삶과 선택이 불편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잔인함을 잘 보여준다.

나는 ‘송두율‘을 이십 수년 전 대학에서 책으로 접했다. 운동권 내 특정 정파가 급부상하면서 그 정파의 ‘구린’ 논리를 그나마 세련된 이국적 철학과 사회학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라 여겨 잠시 살펴봤다. 자기 나라를 떠나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고민할 법한 실존적 고민이 그의 사회철학에 녹아 있었다. 동양인, 그것도 ‘반쪽짜리 한반도인’이라면 당연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했다. 얻는 것도 꽤 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그 ‘정파’때문에 그를 잊었다.

오래전부터 경계를 걷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경계인의 삶으로 깨닫기 시작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성공회라는 교단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것은 모호한 길의 모험이었다.

소위 ‘송두율 사건’을 나는 미국에서 지켜봤다. 노무현 참여 정부 때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과도 한 해 차로 겹친다. 그를 대하는 한국 사회나 이후 이어진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싸움은 거의 광기로 보였다. 밖에서 본 탓일 테다. 국가보안법은 거의 박물관에 보낼 수 있었으나 실패했고,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cf. 예수와 국가 보안법

나는 그가 선택했던 어떤 일과 그와 연관된 운동권의 특정 정파를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으나, 그가 귀국 후 겪은 2003년과 2004년의 삶을 통해 경계인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시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할 말이 있겠지만, 경계를 걷지 않는 이들은 그 정신과 고민을 지나치기 쉽다.

그를 돕던 한국 친구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 모진 어려움을 뚫고 버텨왔다. 송두율은 아마도 그동안 민주화 운동을 하며 한국 안에서 고생했던 친구들과 소위 ‘운동 진영과 정세의 곤란함’을 이해하여, 어쩔 수 없이 ‘전향’을 발표했을 것이다. 발표를 위한 늦은 밤 대책회의에서 그의 아내와 귀국 추진 책임자가 벌인 언쟁은 가장 마음 아픈 대목이다. 누구를 나무랄 수 없다.

송두율과 그의 아내는, 누군가에게는 자기 행동의 변명, 혹은 고생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들릴지도 모르는데도, 자신들이 “경계인”임을 강조한다. 내가 듣고 보기에 이것은 그 어떤 변명도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이요, 자기 충일성(integrity)이다. 이를 포기하면 사람은 제대로 서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를 쉽게 포기하도록 얼르고 협박한다.

흔들리는 송두율과 아프게 지탱하려는 그의 아내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많이 생각했다. 그들의 독일 삶은 어땠을까? 마지막 한국 방문이 겨우 3년 넘은 내게도 그리움이 아련한데, 그들은 37년을 이국에서 살아야 했다. 거의 유배요, 망명이다.

송두율은 “경계도시2” 상영에 덧붙여 독일에서 강연을 했다. “경계인”의 정의라 생각되는 대목을 뽑으면 이렇다.

“사람들과 예술은 여러 경계선을 넘을 수록 풍부해지는데 우리는 두 가지밖에 없다. 양자택일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간(人間), 공간(空間), 시간(時間)’ 등, 그 사이(間)가 중요한 것이다. 그 사이를 강조한다… ‘경계’ ‘경계선’이라는 것은 경계가 생겨 제3자가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공간이 더 커지는 개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창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경계는] 모든 것이 서로를 비출 수 있는 공간이다. 고정된 공간이나 무엇을 담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공간이다. 모든 공간이 열리니 “실시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을 비춰줄 수 있는 서로의 주체인 간(間)을 가능하게 한다.”

송두율은 이 “경계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고 경계의 지경을 넓히려 했을 것이다. 강연에서 그는 화엄경을 종종 인용했지만, 예수도 바로 그런 경계를 걸으며, 그 경계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걸었다.

이것은 유배와 망명에 관한 보고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한 사회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새로운 제3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주변부의 유배/망명객이다. 한편, 이 유배의 실존과 지식인의 실존에 관해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오래도록 깊이 고민한 바 있다. 사이드는 말한다.

“유배/망명은 가장 슬픈 운명이다… 어디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 채 언제나 불화를 이루며 과거에 대해서는 슬픔을,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떠돌이이기 때문이다. 참 지식인은 실제 유배된 망명자와 같이 주변자, 길들여지지 않는 자이며, 권력자라기보다는 여행자에 가깝고, 관습적인 것보다는 임시적이고 위험한 것에 가깝다. 현 상황의 권위보다는 혁신과 실험에 더 투신한다. 유배된 망명자인 지식인의 역할은 관습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대담한 행위에, 변화를 표상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일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참 지식인은 모두 타인처럼 여행한다.

송두율은 2004년 다시 독일로 떠났고 그 뒤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방문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전보다 더 큰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내가 기다리던 전화도 결국 오지 않았다.

아, 이국 땅에서 이국 맥주가 급하게 ‘목 마르다.’ 냉장고는 텅~. 깊어지는 밤, 사람도 ‘고프다.’

2 Responses to “경계도시 속의 경계인”

  1. 유상신 Says:

    기다리던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가까이 계셨더라면 밤새우며 맥주 친구가 되어 줄 것을…
    타인처럼 여행하는 그 길에
    비록 서 있는 자리는 다를지라도
    그래도 최소한 한 사람은
    공감의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따라 모호하게 걸어 오신 길,
    그 경계가 넓혀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ply]

    fr. joo Reply:

    사랑하고 존경하는 신부님, 격려와 기도 고맙습니다.

    저도 신부님과 맥주 친구가 되면 좋겠는데, 이 처지는 모두 제 탓이지요. “서있는 자리는 다를지라도, 최소한 한 사람은 공감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다”는 말씀에 힘이 납니다.

    ‘기다리는 전화’는 결국 며칠 뒤 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확인했어요. 😉 기다리던 만큼 간절한 해결은 나지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한 걸음씩 나갈 뿐이지요. 그 사이에서 저 자신이나 가족이나 다른 이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경계인으로 사는 일은 시련이지만, 축복이기도 합니다.

    [Reply]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