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길의 모험
격월간 [공동선] 3-4월호에 실린 글을 이 자리에 옮겨 싣는다. 쓰나미 재해에 관련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을 번역하여 싣는 일로 인연을 맺은 “공동선”에서 다소 거창하게 “나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부탁해 왔다. 나이 70줄은 돼야 이런 제목을 받을 만한 터에, 뭘 살아왔다고 “나의 길”을 운운하는가 싶었는데, 바로 으레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앳된 생각이라도 나누려는 게 기획의도라는 해명에 한번 써보마고 했다. 내뱉은 말들은 늘 부끄러움이지만, 여전히 걸어가는 여정길에서 우연히 만날 어떤 날줄이 되는 경험 나누기였으면 하는 한가닥의 바람일 뿐… 여기에 중복 게재를 허용해 준 격월간 [공동선]과 문윤길님께 감사를 드린다.
모호한 길의 모험
길지 않은 생을 살았어도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던 순간들은 모든 과거에 대한 회상을 감사의 마음으로 끝내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풍성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론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은 제각각이고, 여기에 각각 퇴행적, 안주적, 진취적이라는 딱지를 붙여도 그만이겠지만, 내게는 내내 이런 과거에 대한 기억이 내 삶을 성찰하게 하고 여전히 걸어야 할 삶의 순례에 길라잡이가 된다. 가만 보면 그것은 살아온 경험이 그만큼 구체적이었던 탓이려니와, 좀 더 분명히 하자면 그 삶의 길모퉁이에서 만나고 배운 여러 사람들과의 사귐이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전히 짧은 내 개인적인 삶의 길에 그 길동무들에 대한 기억과 감사가 자리 잡아 아직 걸어야 할 길에 대한 가늠자를 마련해 준다. 그 길들은 어린 시절에 걸었던 가난의 질척거리던 길로부터, 종교적 전통을 통해서 얻게 된 신앙의 태도, 그리고 짐짓 세상을 다 가졌노라고 뻐기려 할 때 모든 생각을 원점으로 돌려버리는 죽음이라는 생각까지도 아우르는 표상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표상에는 구체적인 삶의 경험과 친절한 길라잡이가 있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의 추억은 삼삼오오 짝지은 또래 무리들이 재잘거리던 무용담만이 아니다. 평야를 가로질러 손에 잡힐 듯이 빤히 보이는 학교까지 닿으려면, 어린 나에게 부지런히 걸어 한 시간이 족히 넘는 길이었다. 확실하고도 분명한 목적지라 하더라도 작은 종종걸음의 수고를 다하지 않고서는 그저 멀리 있을 뿐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그 긴 발걸음이 지루하지 않은 까닭은 동무들이 있어 재담을 나누며 장단치다가도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쉴만한 풀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 평야에 내린 짙은 아침 안개는 불과 몇 발짝 앞의 동무를 아득하게 숨기기도 했다. 그 속에서 숨고 찾는 것이 또 다른 놀이가 되는가 하면, 우리가 걸어갈 삶의 길들이 늘 분명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 삶의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동무의 뒷모습에 어떤 두려움이 엄습하다가도, 잰 걸음에 다시 잡히는 모습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학교에 다다랐고, 우리의 머리카락은 안개로 맺힌 이슬방울로 이미 하얗게 새어 있었다.
겨울의 하교 길은 소년들의 가난한 외투를 한없이 춥게 만들었다. 눈보라에 아들을 마중 나온 당숙모는 견딜 만하게 보이는 자기 아들은 뒤로 따르게 하고는 변변한 겨울 외투 없이 얼어가는 나를 들쳐 업고서 우리 집 아랫목으로 묻어 주면서 따뜻하게 졸리는 기억을 남겨주셨다. 질척거리는 여름의 그 길은 새로 산 고무신이 미끄러져 찢어질까 무서운 맨발의 등하교길이기도 했다. 싸움에 코피가 나기도 했지만, 며칠 후에는 옆 동네와 축구경기를 벌이기 위해 꼭 필요한 단짝인지라 멋쩍은 웃음으로 화해의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거듭되다가 우리는 졸업식에서 선후배가 되어 눈물어린 송사와 답사를 나누면서 커갔다. 이런 멀기만 하고 질척거렸던 그 길은 커서 걸어보니 이십여분의 짧은 거리였지만, 길동무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종교는 이처럼 불확실하고, 두렵고, 외로운 길들에 대한 지름길을 자처하곤 한다. 그저 이웃으로 이사 온 탓에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전혀 다른 문화의 본산이었고, 모든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단박에 물리쳐 명쾌한 답변을 제공하곤 했다.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교회는 논리적이면서도 분명한 문서의 근거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명확한 해명들은 대체로 기존의 생각들에 대한 분명한 반대나 배척이 되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교회에 다니는 나와 그렇지 않은 동무들 사이에 선명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이가 분명할수록, 확신이 굳건할수록 나는 종교적 구원에 가까운 선민이 되었고, 다른 동무들은 내 안타까움과 동정의 대상이었다. 어서 저들을 어리석고 어둡고 희미한 안개를 벗어나게 해서,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진리로 초대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내 생의 목표가 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확신은 나와 다른 이들의 차이에 집중하게 했고, 그 다름의 차이는 옳고 그름의 차이로 넘어가곤 했다. 내 길은 혼돈의 안개를 지나서 거울같이 투명한 진리의 길로 가노라고 자신했다.
세상이 하나의 종교적 체계로 설명되고, 세상의 모든 풍경이 하나의 렌즈와 필터로만 조망되어 인화지에 찍힌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자랑스러울 법도 한 “오직 하나”라고 하는 렌즈와 필터는 대체로 “편견”과 동의어이다. 편견은 한쪽만 본 광경이기에 전체 상에 대한 왜곡과 오해의 여지를 남기며, 여기에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힘이 작용되면 “차별”이라는 물리적인 분리와 억압을 가져온다. 세계의 역사를 차치하고라도 교회 역사의 단막들만 들춰봐도 종교적인 진리의 수호라는 견지에서 나온 이런 편견과 차별이 가져온 참상이 타래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공교롭게도 “우리와는 다른 이단”이라고 배웠던 바로 그 종교적 전통을 통해서 다가왔다. 근본주의적 장로교인인 십대 소년이 가톨릭 교회가 세운 학교에 우연히 입학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만나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남을 다르다고 결정짓는 처지에서 이제 내가 다르게 규정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때로 극렬한 저항을 낳기도 하지만, 거기서 만난 선생님은 그 차이를 다름으로서만 인정했지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나가지는 않았던 탓에 쉽게 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당신이 속한 교회 역시 대체로 차이에 따른 배타적 태도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우선 인정하고 대화하는 길을 선택하시고는 그 길에 나도 초대하셨다. 많은 이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여러 이유에서 다른 종교 혹은 다른 교파 사람들은 거의 떠나가고 홀로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또다시 다름을 넘어서 추상적이나마 소수자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열어보는 경험이었다. 이런 대화와 초대의 길, 그리고 소수자로서의 경험은 이후 어떤 극단적인 대결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길을 나는 내 자신이 속한 그리스도교 전통 가운데 하나인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이 전통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신학자, 교회 정치적 체제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길”이라는 표상을 통하여 여전히 걸어가야 할 순례의 여정으로 신앙을 드러내고자 했다. “중용의 길”이라고 번역할 법한 라틴말 “비아 메디아”(via media)는 종교적 가르침의 배타적 우위성 혹은 교리적 확실성에 기초한 선악의 분명한 판단을 비켜가는 새로운 길로 다가왔다. 이는 이도 저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의심스러운 주장이어서 현대 한국 사회처럼 명백한 정체성을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참 견뎌내기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중첩된 결들은 교리적 명확성이나 일사분란한 체제의 통제로 잡히지 않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수준의 폭력에 의한 사례들로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우리말에서 타협이라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 함의를 비치게 되었는데, 모호성, 불확실성과 더불어 중간지대, 회색지대라는 말들의 뜻을 지난 세월 동안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 것은 한국 사회가 겪어야했던 격랑의 세월로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가치와 길에 대한 성찰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놀라는 바는 이러한 “비아 메디아”의 모호성을 성찰하다 보니, 극단적이라며 비판하며 탈출하고 싶었던 그 명확성과 배타성의 길들에 감춰져 있던 중요한 덕목들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며, 어려움을 무릅쓰는 어떤 순교자의 정신, 그리고 비판의 정신 등이다. 결국 확신에 찬 자신의 길에서 조금 물러서 보면 좀 더 넓고 깊은 전망이 드러나면서, 삶이 가진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여유가 생겨났다. 이것을 경계 선 상을 걷는 길이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 표상은 경계선 상을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 고쳐주었는데, 다들 돌아갔으나 한명만 되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은 딱히 돌아갈 자기편이 없는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길 자체가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길, 아니 경계 선 상에 계시며, 양 편의 중심부에서 배척당한 주변인들과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 삶을 따르는 것이 “비아 메디아”라고 본다.
이런 우왕좌장을 거듭하다가 나는 공부하러 남의 나라에 와 있다. 공교롭게 이 나라는 중간의 길, 사이의 길을 가장 강력하게 거부하는 미국이다. 세계를 선과 악을 분명하게 선 긋는 세계의 경찰국가 혹은 재판장 국가를 자처하는 이 나라는 우습게도 이제 제 나라 자체가 모든 분야에서 양극으로 나뉜 사회가 되어 버렸고 이 대결의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맞은 것이다. 예견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내 앞에 놓인 또 다른 절명의 길을 살펴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성공회 기도서의 장례 및 매장 예식에는 옛 베네딕도 수사들이 부르던 성가가 하나 들어 있는데, 그 전체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첫 구절이 던지는 뜻이 깊다. “삶의 한가운데 죽음이 있으니” (media vita in morte sumus). 이것은 내가 선택한 모든 길에 대한 도전으로 들린다. 어떤 삶의 길도 그 과정 속에서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니, 이 종말을 기억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러니 이제 공부의 목적도 이런 종말의 입장에서 되새겨보곤 한다. 공부는 누군가가 절대적인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신화에 도전하면서, 그 죽음을 되새겨 주는 길이다. 그리하여 공부는 사람들이 걷는 삶의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인정하면서, 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진리의 파편들을 함께 어우르게 해서 나눌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삶의 길 도처에 매복한 매 순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절대적 권력과 힘에 기반한 확실성과 항구불변의 신화를 매 순간에 종말시키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이제 내게 어떤 확실한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이라는 경계선 상을 여러 길동무 특별히 주변인들과 함께 걸으며 견디어 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격월간 [공동선] 2006년 3-4월호)
March 15th, 2006 at 8:16 am
Fr. Joo, Thank you for posting your autobiographical narrative here. It is condensed but touching. And I like it.
Happy St.Patrick’s Day!
JS
PS: Please excuse me writing in English! Korean typing isn’t available for the moment.
[Reply]
March 21st, 2006 at 8:49 pm
루시안님 // 뭐 touching 까지야… 어쨌든 반갑습니다. 논문을 잘 돼가고 있나요? 저는 뭐 공부가 재밌기는 하지만 살아버티기가 버겁습니다. ㅎㅎ… 건강하세요.
[Reply]
February 24th, 2007 at 12:28 am
[…] 이 말의 교회사적 기원과 더불어, 이 말이 근거한, 그리하여 이 말의 의미를 키워나갈 복음적 의미의 중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한 바가 없는 듯하다. 언젠가 허튼 글에서 이 중도를 예수님이 걸으신 “경계 선상의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니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내쳐진 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로서 중도를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 길은 매우 위험스럽고도 단호한 길이기도 하겠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기하여 벼랑으로 밀쳐 떨어뜨리려는 이들을 단호히 제치고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루가 4:30). 여러 논란과 위기를 겪고 있는 성공회는 이런 예수님의 “한가운데 길”을 단호히 걸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한가운데 길”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 […]
January 12th, 2012 at 8:57 am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글이 담고 있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노인처럼 성숙한 성찰을 두루 나누고,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특히 등교길에 대한 구절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그 어린 시절 등교길에 대한 묘사는 우화적 상징들처럼 삶을 빗대어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폭넓은 사유의 변주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Reply]
January 30th, 2013 at 6:59 am
[…] 오래전부터 경계를 걷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경계인의 삶으로 깨닫기 시작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성공회라는 교단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것은 모호한 길의 선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