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수요일 – 배신과 어둠을 넘어
이사 50:4~9 / 시편 70 / 히브 12:1~3 / 요한 13:21~32
2014년 4월 1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성주간 성 수요일은 배신의 수요일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계획을 세운 날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 복음의 장면은 아무래도 성 목요일 최후 만찬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였던 유다의 배신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은 대체로 성 수요일이었기에, ‘배신의 수요일’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사람 유다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받는 유대 땅의 현실에 깊이 마음을 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폭압적인 권력을 물리칠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 단체의 일원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곧 오실 정치적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며 로마의 지배 권력과 싸우던 혁명 단체의 일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그 제자단에 참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제자단 사이에 신임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돈이 오가는 재정 책임은 웬만한 신뢰가 쌓이지 않고서는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신임을 얻은 재정 책임 비서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 추측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먼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나 그를 만나게 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아직 그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서는 그 이유를 단순하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만 전합니다. 그에게 들어간 사탄은 지난 사순 첫 주일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만났던 그 악마였을까요? 잘 먹고 잘 사는 안녕과 권력과 명예를 미끼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고생했던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악마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탄 악마를 물리치셨지만, 안타깝게도 가리옷 사람 유다는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애처로운 일입니다. 특히 유다가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애처로움이 더욱 깊어집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과 제자단의 오랜 신임을 받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사고락과 친구의 신임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배신은 친구 사이에 일어납니다. 가족 사이에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깊이 마음을 두며 배려했고 보살폈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남남에게는 배신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배신은 안타깝습니다. 모든 배신에는 인생의 쓴맛과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때 배신자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알아차리는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할 자를 지목해 달라는 어떤 제자의 부탁에 신호를 줍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빵을 떼어 유다에게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그 일을 행하라.” 게다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호로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합니다. 입맞춤은 언제나 “평화의 입맞춤,” 즉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들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Michiel van der Borch,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에게 빵을 주시는 예수,” 14세기)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나오는 행동이 유다의 배신행위에 그대로 겹쳐집니다. 우리는 서로 웃는 얼굴로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식탁에 초대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그의 피에 적셔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유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그리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을 바쳐 따랐고, 예수님과 풍찬노숙을 같이했고, 함께하던 친구 동지들과 함께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유다는 여기에 모인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배신을 생각할 때,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은 배신의 잠재적 피의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무엇이 유다를, 그리고 오늘 우리를 배신의 행동으로 이끌까요? 사탄입니다. 광야의 금식 40일을 마친 예수님께 나타났던 그 악마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녕과 복지만을 신앙의 열매로 생각하게 하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닌 지위로 남들을 나무라고 호령하고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멋진 유혹입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려고 으스대는 근사한 유혹입니다.
오래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와 함께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이 달콤하고 멋지고 근사한 유혹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금세 배신자 유다처럼 악마에게 우리 영혼을 팔아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이요, 늘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유다는 빵을 받아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성 수요일은 어둠의 수요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어둠 속에 똬리 틀고 있는 배신의 그림자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어둠을 직시하고 살피는 시간입니다.
전례 전통의 여러 교회들은 성 수요일 밤에 ‘테네브레’(Tenebre)라는 촛불 예배를 드렸습니다. ‘테네브레’는 어둠과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이 예식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켜고, 이와 더불어 다른 여러 개의 촛불을 밝히고 그 둘레로 모입니다.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끄면서 드리는 기도의 예식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상징한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런 뒤에 갑작스러운 그 어둠 속에서 시끄러운 굉음이 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는 소음입니다. 어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예식을 통해서 많은 신앙인은 자신의 어둠을 되새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 즉 그의 나눔과 고난과 죽음을 닮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허공 같은 어둠만 남습니다. 거기에 배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웁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그때, 예수님께서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돌이켜서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므로 사순절 마지막 수요일인 성 수요일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이마에 재를 받는 순간을? 그때 들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은 인간 존재 조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다들 죽을 존재들이라는 운명을 되새겨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은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끝에 새로운 생명, 즉 우리가 먼지와 흙에서 창조되었듯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롭게 빚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삶에 대한 기대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회개하며 “돌아오라,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창조와 생명을 함께 만들자는 초대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학자이자 시인인 월터 부르그먼은 이 수요일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이 수요일, 우리는 재처럼 창백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드리나니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활 행진에 드리나니.
해가 지기 전, 우리의 수요일을 받아 주시고, 우리를 부활케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기쁨과 활력과 용기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두려움 없이 주님의 진리를 살게 하소서.
여기에 오시어 우리의 수요일을 부활케 하시고
자비와 정의와 평화와 너그러움이 넘치게 하소서.”
이제, 이 성찬례에서 여러분은 배신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