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일 – 부활은 없습니다.

사도 10:34~43 / 시편 118:1~2,14~24 / 골로 3:1~4 / 요한 20:1~18

2014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후 6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여러분은 오늘 아침, 혹은 오늘 오후, 집을 나서면서 어떤 길을 걸으며 나오셨나요? 혹시 그 길 사이로 예쁜 꽃들이 피어있지 않던가요? 거리 곳곳에 화사한 봄 내음이 가득하지 않던가요? 혹시 여러분은 이 시간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성당 오르막길 화단에 피어난 꽃들을 보셨나요?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피고선 수줍은 듯 뽐내는 그 환한 꽃들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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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쁜 꽃들이 사방에 피어나는데, 생때같은 목숨들이, 막 꽃망울을 피우려는 생명들이 순식간에, 이 세상에 맺은 사랑들과 이별해야 하는 사건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밖에 핀 꽃들처럼 예쁘게 피어날 생명들이 우리와 억지로 이별해야 했습니다.

제 친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나가 있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무 때나 쉽게 쓰다듬고 안아줄 수 있었던 내 딸 예은이. 그러나 지금 나는 겨우 예은이 곁 수십 미터 앞에 가려고 사정하고 부탁하며 갈아타고 또 갈아타서 이제 예은이의 눈물 위에 떠 있습니다. 이곳이 현재로써는 예은이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

여전히 제 눈에는 세상에 널리 핀 봄꽃들과 차디찬 바닷속에서 숨을 거둔 생명들이 겹쳐지기만 합니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서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세월호에 갇힌 생명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 눈물 속에 들어와 앉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십자가의 절규가 들립니다.

우리는 무엇하러 지금까지 사순절의 여정을 걸어왔던 것일까요? 우리는 어쩌자고 지난 성 목요일의 세족례와 성찬 제정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을까요? 성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침묵과 어둠 속에 묻히신 성 토요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나서 어제 부활밤과 오늘 부활일에 다다랐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복음, 어떤 기쁨을 나누자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일까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상황을 보고 당황합니다. 무덤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굴러있고 무덤이 열려 있습니다. 이 소식을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니 그들도 놀라서 황급히 달려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는 당황할 뿐 어떤 생각인지 무심한 모양으로 집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복음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직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 우두커니 남습니다. 마리아는 거기서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그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 애통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우는 이유를 물으니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분이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돌려주세요. 제가 모셔야겠어요.”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있는 모든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들의 물음과 울음이 아니던가요?

그때 그 흰옷을 입은 이는 이렇게 부릅니다. “마리아야!” 아, 바로 그때, 마리아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부활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상실된 순간, 모든 것이 없어진 순간, 그리하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그리하여 우리에게 눈물 밖에는 달리 흐를 것이 없을 때, 그 눈물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볼록렌즈가 되어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만나게 합니다. 그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우리의 귓가를 적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 눈물만이 우리의 뇌를 깨우고 일으켜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을 고스란히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통해 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눈물이요, 그리고 기뻐하는 눈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 부르며 홀연히 앞에 나타나는 생명들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애통과 사랑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 되는 부활 사건을 가로막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침묵과 어둠과 죽음의 무덤 문을 부숴버려야 할 텐데, 그 육중한 돌문으로 무덤을 가로막고, 오히려 단단한 콘크리트로 무덤 문을 아예 발라버리며 죽음을 재촉하고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들이 이 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꽃 같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든 일에는 어른들의 욕심이 곳곳에 그득그득합니다.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오래된 배를 수입하고, 법규를 수정해서 더 오래 쓰도록 하고, 사람과 짐을 더 싣도록 개조하고, 빠듯한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위험한 지름길을 선택하고, 위험한 뱃길을 초보 항해사에게 맡겨 여전히 속력을 내고, 배와 함께 목숨을 같이해야 할 선장은 가장 먼저 배를 빠져나옵니다. 그 순간, 꽃 같은 생명들은 여전히 객실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로 위로하며 못다 한 사랑의 안부를 전하며 대피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4월의 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계절은 얄밉게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 황무지에도 꽃을 피웁니다. 지난 10년만 돌아봐도 우리 사회의 욕심과 이기심과 속도가 가져온 황무지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위에 핀 망각의 꽃들은 무엇이나요?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대로 ‘자율 학습’이라는 언어도단의 강제 수업에 내몰리고, 성적과 대학 입시의 중압감 속에서 자살하는 일이 속출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경쟁과 속도에서 뒤처질까 자신을 학대하고, 자녀들까지 그 경쟁과 속도전으로 몰아넣습니다. 조금 여유로운 이들은 자녀들을 학교와 학원에 맡기고 건강 산행과 나들이에 몰두합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쓸모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이상한 단체에 동원되어 악을 쓰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계 경제 대국의 허울 뒤에 드리워진 그늘 밑에서 수많은 이가 생활고에 허덕이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청소년들은 여전히 감옥처럼 생긴 교실에 갇혀 있고, 그 장면은 세월호 객실로 이어져서 어른의 명령만 기다려야 하고, 어른들은 자녀들 교육비를 벌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냄새나도록 밖을 돌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 지긋하게 눈길 한번 나누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입말은 거두고 문자와 이모티콘에 우리 마음을 담으려 합니다. 생명 없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촉촉한 눈과 부드러운 귀를 대신해 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냄새 맡을 시간마저도 우리의 경쟁과 속도에 저당 잡히고 삽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이 한국 사회의 빌딩들, 산을 뻥뻥 뚫어놓은 터널들, 산과 들을 인정사정없이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들, 강마다 숨을 끊듯 펼쳐진 콘크리트 더미들. 한국 사회라는 황무지에 핀 망각의 꽃들은 콘크리트 더미이고, 뒷거래가 흉흉한 토목공사의 흔적입니다. 우리 삶에 담긴 아픔과 고통과 눈물을 모두 망각하도록 하고, 질척거리는 가녀린 기억의 꽃이라도 피울라치면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의 콘크리트 숲입니다.

합리성과 시스템을 강조하여 관련 안내서가 모두 갖춰졌다 하더라도, 이익과 경쟁과 속도라는 사회적 질병 안에서는 헛것이 되기는 삽시간입니다. 이익에 눈이 멀고, 경쟁이 만든 속도 때문에 깊이 응시하는 일은 찾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의 지난한 훈련으로 우리 기억의 세포들을 항상 깨우지 않으면 합리적인 시스템의 문화는 몸과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겉치레 점검 목록으로 더 큰 화를 부를 뿐입니다.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고통과 슬픔, 상실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매일 혹은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이를 기억하고 고난의 산물인 몸과 피를 나눠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몸과 피가 되기로 작정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라야 더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없을 테니까요. 그 기억에서라야 질척이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성찬에서 기억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살지 않고서는 부활의 생명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위에, 세월호에 갇혀 잠긴 꽃 같은 생명들의 눈물 위에,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 주저앉아 절규하는 이들의 눈물 위에 있습니다. 이 눈물로 흉물스러운 경쟁과 속도를 쓸어내고 우리 몸과 정신과 기억을 다시 씻어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활은 영영 없습니다.

One Response to “부활일 – 부활은 없습니다.”

  1. 홍삼 Says:

    신앙인이라면 아픔을 기억해야한다는 말씀에 크나큰 공감..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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