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성령 강림 – 샬롬과 살림의 질서

주낙현 신부

성서는 하느님의 일이 내림과 올림의 형태로 반복되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에 관여하시려고 인간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가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오르셨습니다. 부활 사건입니다. 그 부활의 연속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끝에 오르셔서 참 인간이 얼마나 거룩하고 높은 존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승천 사건입니다.

이제 새로운 내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역사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살아가는 신앙인 공동체인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 삶이 인간의 역사 곳곳에 확대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http://ecva.org/exhibition/WaP/080-KathyBozzuti-Jones-WAP.htm

사도행전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성령이 내려오시자 출신과 성격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어떤 걸림돌도 없이 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출신과 지식과 언어에 대한 차별이 그쳤습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을 내다 버리고, 하느님의 구원이 ‘만민’에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남녀노소 어떤 차별 없이 각자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건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이를 서로 존중합니다. 말 못 하며 살아야 하던 ‘종’들도 ‘예언자’의 위치를 얻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건네신 ‘샬롬’(평화)의 질서, ‘살림’의 문화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 속에 깃든 새로운 ‘샬롬’의 기운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살림’의 숨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서로,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호흡입니다.

성공회, 천주교, 개신교 같은 서방 교회는 성령이 불처럼 내린 것을 상상하며 ‘홍색’을 전례 색깔로 삼았습니다. 한편, 정교회 같은 동방 교회에서는 성령이 주시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녹색’을 성령강림일의 전례 색깔로 삼았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연중 기간에 생명의 ‘녹색’을 사용하는 것은 이 관습을 되새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활밤에 새 불을 축복하며 열린 시간은 이제 하늘에 불처럼 내려오는 성령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의 삶을 채웁니다. 그러니 성령강림일 이후의 삶은 성령으로 옛 질서를 불태우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살림을 누리면서 그늘 진 곳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삶입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