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으로 건너가자 –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저편으로 건너가자” –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마르 4:35~41)1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게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잠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보채는 통에 바람을 꾸짖어 구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수님이 옆에 늘 계시는데도 신뢰하지 못하여 삶의 고난을 겪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인생의 모든 풍랑은 잔잔해지리라는 기대 어린 풀이가 짝을 이루기도 합니다. 나름 뜻이 깊지만, 더 깊고 너른 차원도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차원과 우리의 삶에서 이뤄나갈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짚어야 합니다.

어거스틴 성인(354~430년)은 예수님과 제자가 함께 탄 ‘배’를 신앙인과 교회의 내면 상태로 풀이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입니다. 종종 배를 위태롭게 하는 거센 바람을 만나 신앙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과 저런 소문에 화가 나면 내면에서 분노의 파도가 일고 모종의 복수심으로 변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도록 내버려 두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까닭입니다. 십자가로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늘 깨우고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우리 자신과 교회는 풍랑에 먹혀 가라앉고 맙니다. 바른 신앙인은 우리 내면 깊은 곳곳에 예수님을 깨워 그분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함께 걷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신앙으로 걷는 인생길이 탄탄대로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신실했던 욥의 고난 이야기를 듣자니 이런 기대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사뭇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일까요? 이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 낳은 창조세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태에서 나온 자녀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지 않을 부모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 고통의 호소와 하느님 은총의 응답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은 종종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시간의 간격을 견디어 내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며, 삶의 고통을 세상 전체 일로 바라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습니다. 자기 내면의 상태를 정직하게 살피라는 초대입니다. 신앙 가운데서도 여전한 고통을 인내하며 세상의 아픔을 발견하는 항해를 계속하라는 부탁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이동과 항해의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납니다. 자기 안에 안주하거나 자기보호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는 ‘이편’을 떠나, 더 넓고 깊게 세상의 아픔을 살피며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로 치유하는 ‘저편’의 하느님 나라로 우리 시선과 행동을 옮겨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분노를 인정하기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깨워 우리 삶의 판단과 행동을 이끄시도록 마음을 열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이 찾아옵니다. 그동안 지내던 대로 자신을 보살피던 ‘이편’을 떠나 세상 문제가 복잡한 ‘저편’으로 떠나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파와 고통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거친 사랑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다집니다. 두려움 없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시선과 행동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종내에 ‘거센 바람’을 평화롭게 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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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6월 21일 연중12주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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