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박해를 넘어 생명을 향하여

오해와 박해를 넘어 생명의 소식을 향하여 (마르 6:14~19)1

세상을 떠도는 ‘소문’에는 사람을 기쁘고 복되게 하는 선한 소문과 사람을 이간하고 오해하게 하는 악한 소문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소문을 바르게 식별하여 복된 것을 더 널리 나누고, 악한 것을 끊어내는 일이 신앙입니다. 교회와 사회, 역사와 정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신앙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왕의 독재를 비판합니다. 이 소문에 왕의 참모와 어용 종교인은 아모스가 ‘나라를 망칠 소리’를 하고 있다며 박해합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길 일이지 예언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응답은 단호합니다. 자신은 정치가가 아니라 농사짓는 보통사람이지만, 하느님의 분부라면 정치가 아니라 무슨 일에라도 관여하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분부를 시편은 하느님의 나라에 비추어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이 아름다운 가치가 성당과 예배 안에서 울리는 노래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왜곡된 세상을 바꾸는 가치와 실천의 소문이 밖으로도 울려 퍼져야 합니다.

못된 권력을 꾸짖고 연약하고 아픈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에 관한 ‘복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에서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돌아왔다는 환청을 듣습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고, 세례자 요한은 권력자의 부도덕한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감옥에 가두었고, 자기 즐거움에 취해 던진 약속에 죄 없는 요한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자, 생명을 빼앗은 자신의 악행과 두려움 속에서 정신착란을 보였습니다.

헤로데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꺼낸 복음서의 뜻은 분명합니다. 세상 권력은 자신의 쾌락과 안녕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누르고 생명을 앗아갑니다. 그 결과는 두려움과 분열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픈 사람을 고쳐주시며 생명을 살리는 길을 올곧게 걸었습니다(지난 주일 복음). 그 걸음이 오해와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배고픈 오천 명을 “거저 주시며 풍성하게 먹이시는” 희망과 구원의 길로 뚜벅뚜벅 향할 뿐입니다(다음 주일 복음).

성공회에 관해 ‘악한 소문’을 입에 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성공회에 ‘이단’ 혐의를 씌웁니다. 세계 그리스도교에서 세 번째로 큰 정통 교단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어떤 이들은 한국의 역사와 변화에 함께한 성공회를 두고 ‘진보-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합니다. 성공회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영성을 깊이 성찰하고 실천하는 신앙 전통이라 해도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혐의와 의심을 작정한 이들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난과 두려움의 영이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흔들리지 않고 오직 ‘복된 소식’의 진실에 굳게 서서 의연히 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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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12일 연중15주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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