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평등한 은총과 영광의 손길

예수 – 평등한 은총과 영광의 손길 (마르 10:2~16)1

메말라 굳어진 마음은 금세 푸석푸석해져서 부서지기 쉽습니다. 본래 깊은 신앙 체험에서 나왔을 아름다운 고백과 신념도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고집과 아집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자신과 신앙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의 굳센 다짐도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유연함이 떨어지고 외로워지고 맙니다. 열린 마음은 이 변화와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흐르는 세월과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솔직하게 식별하면 억지로 자기를 세울 일이 없습니다.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계를 인정할 때 오히려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새로운 힘으로 또 다른 삶의 순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혼 문제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는 상대방을 “버려도 좋은 존재”로 여기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도 덫을 쳐놓고 “속을 떠보려”는 행동입니다. 이런 질문과 행동은 모두 자기 자신의 굳어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걸고 넘어뜨리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창조 때” 마련된 관계, 곧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품는 삶을 회복하는 일만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다. 오늘날 이혼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굳어진 마음에 물을 주고, 닫힌 마음을 열어 넉넉한 마음의 삶을 누리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창조 때 모습대로 우리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일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변하고 초월하는 진리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미끼로 눈먼 확신을 주지도 않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비밀스러운 진리를 가르치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모든 사람과 창조세계 전체가 공평하게 누릴 때 하느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안아 축복하십니다. 오늘날과 달리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있으면 불편한 존재, 짐이 되는 이, 보살핌이 없으면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어린이를 향한 축복은 하느님 은총의 평등함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신앙과 은총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나무라시고 화를 내십니다”(13,14절). 그 처지와 상태가 어떻든 모든 사람을 향해 긍정하고 받아들여, 그들을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확인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형제자매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을 들어 올려 영광과 구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니 히브리서의 감사 노래는 이제 우리의 찬양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밀어야 할 손길의 확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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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4일 연중27주일 주보(↩)

2 Responses to “예수 – 평등한 은총과 영광의 손길”

  1. Thomas Says:

    “하느님” 이야말로 불변하고 초월하는 진리 그 자체가 아닌지요 ?
    “영원한 생명” 이야말로, 불안하게 흔들림을 삶의 지배적인 특징으로 인식한 후에, 그 대안인 “믿을 대상” 으로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요 ?
    진리를 더 가까이에서 접하는 “소수” 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수도원 제도는 왜 존재하는 것인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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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homas Says:

    바오로는,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확신에 차 있다고 했으니, 확신이란, 더군다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확신이란, 기본적으로 “눈먼” 것이고 눈먼 것”이어야만” 하지 않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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