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신앙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환대의 신앙 (마르 9:30~37)1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원수를 갚아달라”고 애원했을까요? 삶이 이처럼 억울한 고통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도 같은 절규를 내지릅니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종교와 신을 찾는 일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울 때만 다급히 도움을 찾고, 좋은 것만 골라서 축복을 구하는 종교와 신을 ‘도구적 종교와 해결사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구와 해결사는 사람이 부려 쓰는 것이니,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힘주시고 고난 속에서도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통념과 말재간으로 우리 신앙을 풀이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지혜와 지식을 굳이 구별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지혜는 연륜이요, 지식은 정보일 뿐이라며 차별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구분은 부질없습니다. 새로운 배움으로 연륜을 늘 새롭게 물갈이하지 않으면, 지혜도 고인 물처럼 썩습니다. 부질없는 구분보다는 지혜의 이중적인 성격,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살피는 것이 낫습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지혜이지만, 멋대로 가진 지혜는 ‘시기심과 야심으로 분란과 더러운 행실을 낳습니다.’ 그러나 ‘위와 밖에서 오는 지혜’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한결같은 순결함과 평화와 자비행으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즉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자신과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원수 갚는’ 방법은 끊임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도전과 씨름하고 대화할 때 나옵니다.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며 가까이 지낸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던 이유는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은 옛 질서와 고정관념, 과거의 유산과 지위가 끝낸다는 뜻입니다. 이 죽음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인 부활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과거에 묶여 자리다툼만 합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바깥에서 ‘어린이’를 불러들여 와 세우십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무력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지위는커녕, 특별한 보호와 배려가 없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낱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37절)에서 우리는 지극한 ‘환대의 신앙’을 발견합니다. 환대의 신앙은 하느님을 도구 삼아 자기만 좋은 축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멋대로 신앙과 지혜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환대의 신앙은 ‘위에서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열고, ‘밖에 있는 이웃’에게 귀를 열어, 하느님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껴안아 동행합니다. 힘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를 밖에서 초대하여 보살펴 키우며 동행할 때라야, 우리의 신앙, 우리 교회의 미래가 열립니다.
-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