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마르 7:1~8, 14~15, 21~23)1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라”(신명 4:9). 종교의 계율이든, 사회의 법률이든, 이 표현만큼 법의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 관계에 관한 통찰과 태도, 개인의 영성 생활에 두루 적용할 지침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모두 자기 뜻 안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도가 없더라도 이런 자기 중심성은 사람 관계를 왜곡하여 깨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떠나서 외로워지며, 다시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마음에 과하고 무례한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면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 자기 ‘밖에 있는 분’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귀 기울이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기 편의를 따르거나 이익을 바라는 조건으로 찾는 여느 종교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자기 체험에만 기대어 하느님을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익계산과 자기 체험을 내세우면, 늘 함께 계셔주려는 하느님을 쫓아내는 꼴입니다. 신앙의 규율과 율법의 목적은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방법을 세워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목적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인 율법이 사람을 옥죄고 억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삼가며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을 없애고, 사람이 만든 관습과 종교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합니다. ‘사람의 종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며 늘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습’은 배고픈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일에 관하여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넓고 깊게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만 간단하게 판단하려 듭니다. 자신이 걸어온 신앙 체험이나 사회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서 ‘공손함’이 희미해지고 무례함으로 혼탁해집니다.
이런 세태와 달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서서 늘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세우는 훈련이 참된 율법이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 사람을 억누르는 율법, 사회를 더럽히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걸을지, 자신을 위한 기복 종교에 안주할지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