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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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루가 23:1~49)1

‘호산나, 찬미 받으소서’ 하며 외치던 환호와 ‘그 사람을 죽이시오’ 하는 성난 외침 사이에 도대체 무슨이 있었던 것일까요?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습니다. 성지를 축복하고 손에 받아든 채로 우리는 주님의 수난 복음을 듣습니다. 이 격렬한 변질과 모순의 순간을 성주간 전례 안에서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며 뼈아프게 직시하라는 부탁입니다.

불의한 재판과 모진 고문,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배신은 재빠르고, 희망의 신뢰는 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욕망으로 맞바꾸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 진실을 알고도 모략으로 덮어버리는 권력의 뻔뻔함을 목도합니다. 힘을 보여줄 때 가까이하던 이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멀리 주변부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십자가 고통의 목격자로 중심에 등장합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사회 외면의 불의 속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며, 인간의 기존 생각과 관계를 뒤집는 일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합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로 진실과 정의를 묻어버립니다. 서로 경쟁하던 기득권자들은 정치적 인기주의에 몸을 던져, 무고한 사람을 희생하는 불의를 작당하면서 서로 ‘다정한 사이’가 됩니다. 무죄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뻔뻔한 변명을 내놓습니다. 모든 형태의 기득권자와 권력자가 보이는 이런 행태를 신앙인은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항변도 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에 다가온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시골 무지렁이 키레네 시몬이 난데없이 등장하고, 제자들마저 도망친 십자가의 길을 눈물 흘리며 동행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십자가 처형 틀 위에서 같은 죽음의 고통을 받던 죄수가 낙원의 약속을 받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내력, 재력과 권력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릴없이 고통과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이름없이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를 선언합니다. 고통의 연대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 안팎에 너절한 차별과 분열과 분리의 ‘휘장’을 찢어내는 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환호의 종려가지가 아니라, 고통의 십자나무 위에 우리의 희망과 세상의 구원이 달려있습니다. 높은 권력의 기득권을 ‘비워서’ ‘종의 신분’으로 내려앉아 세상 고통의 밑바닥과 손을 잡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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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20일 성지 및 주의 수난 주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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