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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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루가 15:1~10)

그리스도교 신앙이 위대한 까닭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늘 의식하며 인정하도록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를 늘 인정하는 일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지혜와 판단이 언제든지 부족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함이 늘 모자란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는 일이 신앙인의 품격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위대한 까닭은 하느님께서 부족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이에 감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더는 돌아보지 않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인정을 삶의 큰 격려로 삼습니다. 유혹에 더 빠지지 않으려 몸과 정신을 또렷하게 하고, 미혹하는 정보에 눈과 귀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류를 교정하는 새로운 지식과 늘 대화하며 배우려 합니다.

손가락질받던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자,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생각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못마땅해” 합니다. 여기서 상식이 뒤바뀝니다. ‘죄인들’은 경청하며 배우려 하고, ‘의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죄인들’은 예수님께 혼나기도 하고 따가운 지적을 받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의인들’이라 여기는 이들은 ‘예수’라는 낯선 청년의 새로운 일과 지식과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관습 안에서 젠체하며 판단만 하려 듭니다. 자신이 만든 신념이라는 우상에 붙들려 고집을 피우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삽니다(출애 32:8~9).

15년 전 9.11 테러 사건으로 미국에서 무고한 사람들 3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일어난 전쟁으로 잃은 군인과 시민의 목숨은 그보다 수십 배에 달합니다. 이 무자비한 사건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잘못된 신념을 다시 돌아보고 고치지 않은 탓입니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상실, 보복과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의 기쁨이 사라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을 더는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기존에 품었던 생각과 신념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오랜 경험과 고정관념이 혹시라도 자기 눈을 가리는 고집이 되는 현실에서 자신을 돌이켜 새로운 세계와 바른 가르침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가르침이 하나라도 아쉬워 간절하고 그 배움에서 변화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찾은 예수님의 기쁨이 이제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회개하며 배우고 고치는 죄인의 기쁨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회개하여 기뻐하는 죄인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의인’이라 인정받은 은총 안에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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