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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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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