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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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의 율법 vs. 환대의 은총 (마태 10:40-42)

우리 삶에는 온갖 배척과 환대가 뒤엉켜 있습니다. 조직을 지키려면 바깥에서 온 낯선 이들보다는 안쪽에 있는 인맥에 기대는 편이 더 지혜롭다고들 합니다. 반면, 고인 물이 쉽게 썩는 일을 염려하여, 새로운 물갈이 말고는 공동체의 쇄신과 성장이 어렵다는 주장도 꽤 설득력을 얻습니다. 일상에서는 서로 가까운 사람들도 어떤 이익 분기점이나 감정의 경계 막바지에서는 등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사람이 만든 배척과 환대의 기준은 정갈하지 않고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주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감추고 덮으려는 거짓 세상을 향하여 진실을 외치고, 힘의 대결로 약속하는 거짓 평화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깃든 우리 교회의 선교 사명이자 기준입니다. 녹록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에 물든 종교가 약속하는 성공과 안위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모진 고생과 박해, 상처와 손해가 뒤따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평화의 행동 안에서 제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이 서로 안에 머물며 일치하는 신비가 펼쳐집니다(40절). 이 신비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확장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이 신비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식별하여 경계합니다(로마 6:12-23). 그것은 ‘신앙 기득권’과 ‘제멋대로 신앙’입니다. 율법은 애초에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조절하고 제어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규칙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종교권력자가 자신은 쏙 빼고 다른 사람들만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때 율법은 선물이 아니라 지배와 배척의 도구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규칙과 제어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자칫 공동체를 또 다른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사도 성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배와 예속, 자유와 정의에 관한 생각을 사뭇 다르게 풀어갑니다. 그 분명한 대조와 역설적인 표현은 새로운 시선을 선사합니다. 사람은 율법이든 은총이든 지배 아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지배받고 사로잡히겠느냐는 선택입니다. ‘죄’는 남을 배척하며 힘을 휘두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여 섬기는 일입니다. ‘죄’는 제멋대로 개인적인 자기감정과 주장에 골몰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하느님의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성찰하여 대화와 배움의 고된 행동에 예속하도록 이끕니다. 제멋대로 세운 배척의 기준과 자유의 환상은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밖이든 안이든 새롭게 다가오는 낯선 도전의 은총을 환대하고 견디는 일은 교회와 세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려는 율법과, 고된 도전으로 낯설게 배우려는 은총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나요? 자리를 지키려고 웅크린 배척의 감정과, 초대하며 부딪쳐 나누려는 환대의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나요? 예언자들과 옳은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은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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