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선교를 넘어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는 우리에게 “낯선 손님”이었다. 게다가 이른바 “서구의 제국주의적 권력”과 나란한 “서구 문명의 총체”였다. 그러나 위압하는 권력이든, 남을 열등하게 보며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보는 문명이든, 그것이 기존 질서 안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때, 그것은 생명을 가져다 주는 복된 소식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식된 모양과는 달리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경험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발견되기 때문이다. 이게 선교 역사를 보는 복잡함의 단면이다. 단칼에 베어 버리는 우를 똑같이 범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과거를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가꾸어 나가는 일이 더 시급하다. “식민과 이식”을 넘어서는 일은 우리 안에 어떤 씨를 발아하여 우리 열매로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2년 식민지 홍콩의 성공회 주교였던 홀 (Bishop Ronald Owen Hall, 1895-1975)은 A Missionary Artist Looks at His Job 라는 60쪽 짜리 작은 소책자를 낸다. 그는 이미 중국 본토에서 오랫동안 선교사 활동을 해온 터였고, 홍콩 교구(당시 빅토리아 교구)의 주교로 30년 이상을 지냈다. 이 분이 바로 1944년 세계성공회 최초로 여성 사제인 플로렌스 리 팀-오이(Florence Li Tim-Oi, 1907-1992)를 서품한 주교이다. 홀 주교는 이른바 식민지적 선교를 벗어난 서구 선교사요 성직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가 쓴 이 소책자는 식민지 선교 혹은 그 방법의 유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후세대 선교사와 사제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큰 울림을 줄 만하다. 아래에 그 요약을 나눈다.
1. 가난한 이들, 주변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머물라.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쓰라. 이것이 바로 예수의 선교 방식이었다.
2. 어떤 만남에서든지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 우정이든 다른 관계에서든 다른 이들을 환대하고 받아들이라. 그것은 한 신학자가 말한대로 “마음껏 사치해야 할 풍요로운” 행동이다.
3.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복음을 살고, 행동하며, 선포하라. 성인 프란시스의 교훈을 명심하여 이 순서를 따라야 한다.
4. 자신이 속한 장소, 자신의 공동체 (혹은 공동체들)에 대한 감각을 지니도록 하라. 그곳이 바로 자신이 터 잡은 자리이며, 자신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진정으로 지켜줄 곳이다.
5.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 그리고 언제든지 그 한계가 도전받을 수 있음을 알아라. 하느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의 장점이 아닌 어떤 힘을 주시기도 한다.
6. 제 2 외국어를 배우도록 하고, 가능하면 제 3 외국어도 배우라. 선교는 경계는 넘어서는 일이다. 한가지 언어로는 오늘날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할 수 없다.
7. “두루주의자”(generalist)가 되어라.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자신의 선교와 사목 활동을 위한 배움의 경험으로 삼으라.
8. 한 두가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라.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다.
9. 자신의 일과 관계없는 취미를 하나를 가져라. 자기 일 외부에 어떤 열정을 가질 때라야, “중압감” (혹은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을 피할 수 있다. 종종 이런 마음은 교회 사목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친다.
10. 기쁨과 희망 속에서 위험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생명을 구하려면 그것을 잃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눈 앞에 있는 지평선 너머를 보는 길이다.
March 16th, 2008 at 1:56 pm
이미 오래전에 읽은 글이지만,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 )
저는 ‘미션’과 같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서구우월주의’랄까,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선 꽤 거부감이 생기는데요. 선한 목적도 그 방식에 의해 폭력이나 강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모쪼록 선교활동을 하시는 많은 분들께서 거듭 명심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안에 어떤 씨를 발아하여 우리 열매로 맺는 것”
이라는 말씀은 울림이 깊네요.
추.
제 글 ( http://minoci.net/461 )
에 신부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서요.
마음 속으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 격려의 댓글인데… ^ ^;
문득 사라져버려서 이게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했더랍니다.
주신부님께서 스스로 지우셨다면 아무런 일이 아닐테지만…
이게 제 블로그의 기술적 문제로 사라졌다면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라서 말이죠.
관리자 ‘휴지통’으로 넘어갔나 봐도 발견할 수 없고 말이죠.
아무튼 겸사 겸사 이렇게 찾아오게되네요.
그건 그렇고…
요즘 너무 새글이 뜸하신 것 같습니다.
주신부님의 좋은 새글 기다리겠습니다. : )
[Reply]
March 17th, 2008 at 2:43 pm
민노씨 / 격려 차,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주셨군요.
여기서 제가 쓰는 “선교”라는 말과 이른바 기독교 팽창주의자들의 “선교 활동”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니, 그들은 “선교”라는 용어를 전용하여 오염시켰다고 하는게 낫겠군요.
“미션”은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최근에 다시 한번 봤어요. 말씀하신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여전히 묻어있는 작품입니다만, 그 안을 잘 들여다 보면 –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 여러가지 전복적인 요소들이 어떻게든 존재한다고 봅니다.
말과 논리, 혹은 정해진 텍스트를 강요하는 선교 방식이 아닌 “예술” (가브리엘의 오보에)이 마련하고 열어 놓는 어떤 초대 같은 것, 부러진 오보에를 어떻게 맞춰 보려다가 부서진 걸 건네는 어떤 부족 청년 (거부와 수용이 같은 집단에서 다른 정치적 목적과 대응의 맥락에서 같이 일어나는거라고 봅니다), 또 멘도사(로버트 드 니로)가 보속을 위한 고행을 할 때, 그 짐을 끊어버리는 것은 하느님도, 가브리엘 신부도 아니라, 바로 그에게 노예 사냥을 당했던 부족이던 것 등… 게다가 마지막 전투와 학살의 장면에서 나오는 선택은, 사실 7-80년대 해방신학의 실천에 대한 논란을 떠오르게 합니다. (뭐, 좋은 쪽으로만 보면요.)
결국 어린이들만 남게 되는데요, 이들이 “자신들의 씨를 발아하여 자신들의 열매를 맺어” 내겠지요.
추: 지워진 댓글
그저 짧게 한마디 썼다가 – 격려하고파서 – 다시 방문해서 제 견해를 좀더 써봐야지 했는데 – 저도 네비어와 네이버 블로그에 불만이 많거든요 – 잘못해서 날아갔어요. 그래서 그냥 지웠지요, 뭐.
별로 찾는 이 없는 블로그라는 핑계로 잘 게으름을 덮으려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겠군요. 민노씨가 새로운 자극을 주니, 저도 힘을 얻어 봅니다. 최근에는 몇가지 진행해야 할 프로젝트와 학교 일도 있어서요.
어쨌든 관심과 격려 대단히 고맙습니다.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