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 자기 중심성을 끝내는 신앙
종말 – 자기 중심성을 끝내는 신앙 (마르 13:1~8)1
“저것 봐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요?” 오랜 세월 주교좌 성당을 가로막았던 추레한 건물이 무너지고 단아한 아름다움과 품격을 지닌 성당이 세상에 환히 드러나자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우리 성당에 찾아온 방문객이 지난 달에만 이천오백 명을 넘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우리에게 어디선가 “저 성당이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면, 우리의 느낌과 반응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바라보며 안타깝게 하신 말씀을 어찌 감히 우리 성당에 빗대느냐고 매우 성낼 모습이 선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당시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람이 감탄하고 소원하는 일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 처지에 따라, 시대 상황에 따라 운명이 뒤바뀌고 불안은 반복됩니다. 사람 마음과 세상 현실은 다르게 돌아갑니다. 사람은 마음의 안녕과 세상의 태평성대를 원하지만, 세상은 즐거움과 기쁨, 고통과 슬픔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사람이 품은 소원은 거의 비슷한데도, 세상이 그렇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품은 소원과 기대가 서로 다르고, 그 기대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길 바라면, 저마다 품은 소원은 서로 충돌하여 갈등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세우기도 어렵고, 어렵고 만들고 유지한 웅장하고 멋진 사회도 금세 무너지는 위기가 닥칩니다.
성서가 전하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만의 편리와 복락을 위해 세운 삶은 매우 위태롭다는 경고입니다. 지금 이뤄놓은 일이 아무리 굳건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뒤편에서 애쓰는 수고와 땀을 되새겨 기억하고 서로 감사하지 않으면 사회와 세상의 기초는 흔들립니다. 웅장한 성취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연약해지고 힘들어지는 상황을 나 몰라라 하면서 건강하게 지탱 가능한 사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르치는 종말은 자기 이익으로만 세운 세상의 질서가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와 희망입니다. 자기 이익을 내려놓고 서로 양보하여 보살피려는 변화는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함께 감내하여 파국을 피하고 함께 사는 질서를 마련하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반복되던 옛 희생제사는 예수님의 ‘단 한 번’ 희생으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더는 누구에게도 ‘자기 대신’ 희생을 강요하거나 덮어씌우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복음입니다. 사람을 옥죄고 통제하는 데 쓰이던 율법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율법은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 마음에 새겨진 행동 양식과 예법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 곳곳에서 지위나 재산과 권력으로 희생이 여전히 일어난다면, 이를 멈추어 끝내게 하는 일이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르고 분리했던 휘장을 몸소 찢어 자유롭게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듯이, 신앙인은 우리 사회에 여전한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람입니다. 눈과 귀를 막고 가르고 차별하는 벽을 뚫고 나온 우리 성당입니다. 서성이는 이들을 환대하며 친교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격려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넉넉히 껴안을 때, 우리 성당은 세상에 새로운 질서와 꿈을 주는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으로 영원히 빛납니다.
-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 15일 연중3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