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성공회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든지 죽든지 해야 할 것인가? 성공회로 오려다가도 선뜻 문지방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보면서, 이렇게 사람끌지 못하는 곳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고민한 일이 적지 않다. 여러 궁리도 하고 시도도 해봤다. 해법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의 어떤 반동세에 힘 입은 것인지, 다시 “성장 욕망”이 이곳 저곳에서 불끈불끈한다는 소식이다. 생존 욕구가 그 기반에 있으니 차마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교회는 당장의 숫자와 생존 욕구 너머를 봐야 교회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고 하지 말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무리로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다. 오늘 어느 블로그에서 받은 충격은, 건실하고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서도 여전히 숫자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아직 철없는 혈기때문인가, 아니면 당사자의 변명일까. 여러 변명과 토를 달고 말았다. 그 본문의 한 토막 (원래 글 링크)을 옮겨 놓고, 그에 덧붙인 토를 여기에 빈한 대로 옮겨 적는다.
몇 주 전에 몸과 마음이 상한 채로 한국의 여러 신부님들과 통화한 뒤 어떤 쓸쓸함과 분개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준비하던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비어져 나올 줄 몰랐다. 그 생각의 결론은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였는데, 아직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이번 한국 감리교회의 대혼란을 계기로 성공회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중략]… 그러나 한국 성공회를 리서치하면서 결론은 아직 유보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국의 성공회가 전체교인수가 5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0만명도 아니고 5만명이라는 점.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점,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의 보통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교회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엘리트들이 관심있는 일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는 보통사람들에 의해서, 보통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보통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via 당신과 가는 길)
내 댓글은 이랬다 (이후 약간 편집).
배달되는 RSS의 글들을 깊이 들여다 볼 처지가 아니었는데, 성공회에 뜨끔한 지적을 하신 것을 보고, 되돌아 읽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방은 수긍하면서도 다시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참에 토를 달아보려고 합니다. 딴 생각, 괜한 토달기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교단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최근의 감리교 사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적어도 감리교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이는 이미 십수년전 감신대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내치는 어떤 힘에 장악되면서 내다보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장로교에서 일어났다면 그냥 갈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뒤돌아 볼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감리교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유지하면서 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최소한 한국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정치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덕이 높으신 감리교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계시니 이 위기를 큰 성찰로 삼아 잘 이겨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중앙집권적 교회 정치 구조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역시 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 그룹)나 자기 그룹 안에서 권력을 가지려 하고, 이로 대결한다는 것이지, 회중들의 의사 결정 구조때문에 권력 남용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의 불균형이 가져온 갈등과, 그 대결의 결과로 보고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해 반가움이 앞섭니다. 같은 전통에서 함께 걸으면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의 길을 걷는 길에서 만날 수 있으려니 그 “유보”가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속깊은 블로그를 훔쳐보는 입장에서 교인 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5만명도 부풀려진 숫자입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인 수가 부풀려진 것처럼 말이죠. 저는 늘 공식 집계의 25% 만을 신자로 보는 계산법을 갖고 있습니다. 어는 종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성공회 신자는 정확히 1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게 맞습니다. 숫자에 정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120년이 다 되는 역사 속에서 이 정도 밖에 신자가 안되는 것을 곧장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견이거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공회가 꼭 엘리트적이었다도 할 수 없으며, 보통 사람의 일에 관심을 다른 교단에 비해 적게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성공회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가 심어놓은 독특한 배타주의, 특히 다른 교단까지도 배타하는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이 가운데서 “작은 종자”는 그 기원이 어떻다 하더라도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전세계의 분포와 전혀 달리 장로교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한국 개신교의 양상이 그 배타적인 신학적 성향과 맞아 떨어진 탓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리 말합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감리교는 60%이상인 장로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민중적인” 혹은 “민족적인” 성향을 가진 교단 교회라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출발에서 한국의 가장 토착적인 교단이라 여길만한 “복음교회”라는 교단은 그 존재가 미미합니다. 이들은 서구 신학을 비판했기때문에 오히려 작게 되었고, 큰 수의 횡포 안에서 이 마이너리티는 그 존재 자체를 지금까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공회로 돌아 옵니다. “숫자”는 큰 유혹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곤 합니다. 숫자라는 점에서 한국 성공회는 어떤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오히려 철 지난 성장 모델에 눈을 돌리려는 욕구가 강해집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이 틀에 들어서면, 오히려 그 ‘작음’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신선도가 급격히 떨어질게 분명합니다. 숫자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정감을 갖고 찾아오지요. 그러나 어떤 성장이요, 어떤 숫자를 갖고 있느냐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서 붙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성공회의 고민이 있습니다.
주어진 처지에서, 저는 한국 성공회의 선교를 일당백의 게릴라전으로 보거나, 혹은 게릴라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만, 이전과는 달리 이런 목소리는 성공회에서마저 정신없는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라는 강박감에 멍든 탓입니다.
토를 단 김에, 덧붙이자면, 어디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예를 드신 성공회의 신학자들 목록은 사실 성공회의 한 방향만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렌즈를 통해서 한번 걸러진 분들이라는 것이죠.
이만, 허접한 토달기를 접습니다. 복된 대림절기 되길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 합장
December 16th, 2008 at 1:19 am
신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 날 성공회가 한국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영향력, 일반인들의 인식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신자인 제 입장에서 봐도 개신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톨릭도 아니고 그 중간에서 애매하게 위치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일테 그동안 성공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계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전주에 살고 있는데, 전주에 마침 성공회 교회가 있어서 한번 찾아가보려고 했지만 근처 사람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더군요.
그런면에서 성공회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반인에게 접근할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Reply]
December 16th, 2008 at 5:30 pm
늦달 / 반갑습니다. 중요한 지적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우선 “적극적으로 일반인에게 접근할 필요”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애매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할 말이 있다고 봅니다. 어디엔가 적은 적도 있긴 하지만, 좀더 살펴서 말해보겠습니다.
전주 교회는 어렵고 작지만 매우 훌륭한 사목과 선교 전통을 가진 교회입니다. 훌륭한 신부님도 계시니, 언제 한번 찾아가 보시길 바랍니다. 외진 동네에 있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가난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헤아려 주시기를.
[Reply]
December 31st, 2008 at 7:46 am
……님의 글을 댓글로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고 귀한 충고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주낙현 신부님의 블로그 전편을 보고 이 댓글을 본다면 다소 엉뚱하다 싶은 글이 아닐까요. 또 보기에 따라서 무례한 글일 수도 있어서 참고 넘어가기 힘들어 몇 자 덧붙입니다.
블로그 글에서 주신부님이 보이려 하셨다구요? 이 게시판이 공적 게시판도 아니고 신부님 자신의 비판적 생각과 신학적 성찰의 견지가 보여진다고 그것을 ‘나대는’ 정도로 치부한다는 건 좀 심한 억지아닌가요.
진보니 온건이니 하는 파벌이 있는지 색안경을 쓰고 보면 모르겠으나 언제 한국성공회 안에서 뜨겁고 진실어린 신학적 논의가 공개적으로 있었는지요. 그리고 마지막의 몇 프로의 비율이니 가시적이니 하는 말은 도무지 논리적으로도 종잡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종교의 본 취지가 뭐냐뇨… 이게 어떻게 질문이 됩니까? 블로그 글이 이해안가시면 질문을 하세요. 주신부님이 잘 설명해 주실테니까요.
새해 댓바람부터 허허해하실 주신부님은 차마 어떻게 하실지 몰라하실까봐 몇자 적었습니다.
[Reply]
December 31st, 2008 at 1:05 pm
……… / 얕으나마 “흐르는 냇물”이라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얕은 냇물이 도통한 체하여 고여 있으면 오히려 썩는 법이니, 흐른다니, 적게나마 안심입니다. 다만 여전히 얕은 냇물이어서 다른 냇물을 만나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라 어여삐 봐 주세요. 어거지로 대하(大河)인 척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애초에 대하가 아니었고, 굳이 그것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 않습니다. 흘러서 다른 냇물을 만나는 걸로 기뻐할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 70대에 멀었으니 그런 깊이있는 말을 할 자격도 제겐 없습니다. 아직 철없는 이의 특권이려니 하고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나이와 깊이와 단호함은 별 연관성이 없다고 봅니다.
“보이려” 했던 점이 감지되었다니, 되돌아 살피겠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다른 나머지 말씀들은 제 머리로 따라잡기 힘들군요.
덧붙임: 두개의 댓글이 각기 다른 글에 붙었는데, 하나는 제 글이 아니라 번역해 놓은 글이어서, 원래 글에 누가 될까봐, 그 댓글을 옮겨 합쳤습니다.
[Reply]
December 31st, 2008 at 1:22 pm
조프란시스 / 허허로운 웃음을 지을 만큼 넓지는 못해서 잠시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뜨겁고 진실어린 신학적 논의”로 발전시켜 달라는 생각으로 새겨 듣겠습니다. 그러질 못했으니. 그런데 자신이 점점 없어져요, 공부를 게을리 한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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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st, 2009 at 8:41 pm
위 ……….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다신 분께서는 혹시 지나치게 정치적 현실에 민감하시다보니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을 현실의 스팩트럼으로 왜곡시키고 계시지는 않는지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상황화(contextualization)된다는 말은 단지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뒤섞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의 시대적 맥락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발견한다는 것은 현실과 복음이 서로 마주하고 스스로를 열어 같은 가치를 발견하고 상호 변화하는 작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소통’한다고 합니다. 복음과 세상이 소통하는 것이지요.
종교는 현실의 대안이되고, 현실 역시 종교의 대안이 될 때, 시대속에서 종교적 가치는 더욱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소통을 방해하는 시대착오적 도그마는 오히려 현실속에 매몰되어 버린 종교적 타락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성공회를 비롯한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등은 진실로 이 시대속에서 무엇이 주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인가에 먼저 민감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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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4th, 2009 at 3:02 pm
…….. / 님이 쓰신 댓글 가운데 삭제를 원하셨는데, 삭제를 원하는 댓글을 적시해주시면 지우겠습니다.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최근에 단 댓글은 잠시 잠궈 놓겠습니다.
업데이트:
…….. 님의 요청에 따라 그동안 올리신 댓글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 님의 댓글에 달린 다른 분들의 댓글은 그분들의 수고로 만들어진 것이니 동의가 없는 한 지우지 않겠습니다.
…….. 님이 문의하신 ‘비밀 댓글’ 기능은 워드프레스의 기본 기능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플러그인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굳이 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제 이메일 주소를 밝혀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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