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
이글은 블로거 민노씨의 글에 대한 한 상념이며, 블로거 아거님과 민노씨에게 드린다.
1.
선한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로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이미 내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분심때문에 흩어져 힘을 못쓰던 생각과 다짐이, 서로 귀 기울인 대화 속에서 자리를 찾아 단단해지고 든든해진다. 일상이든, 블로그이든, 트위터이든, 그 대화와 나눔 속에서 그 단단한 알맹이를 키우고, 흩어진 상념을 통해서나마 자신을 드러내어 바라 볼 수 있는 일은 영적인 일이다.
거대한 힘의 구조 속에 부속처럼 끼어서, 혹은 그에 저항한다 할지라도 힘이 달려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처지에서, 이러한 대화들은 사소한 것이더라도, 허튼 지혜이더라도, 일천한 경험이더라도, 공감과 기쁨으로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일으켜 세운다. 새로운 질서나 공간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위로와 공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동안에 조금씩 쌓이고 퍼질 수 있을 것이다. 트위터의 짧은 몇 마디든, 블로그의 어설픈 고민이든, 엮이는 동안 서로 도우며 질정할 수 있다면.
한편, 이런 기대는 사람마다 다르겠다. 인터넷이든 어디든, 어떤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이런 공감을 확대하고 기쁨의 전염을 확장시키는 일이라 믿을 수 있다. 아니라면, 이 공감을 향한 행위도 본질상 일인극의 무대일 뿐임을 깨달아 그 무대에 선 실존의 깊이를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민노씨). 그마저 아니라면, 인생에서 펼쳐지는 어떤 위대한 무대를 꿈꾸며 그 희망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러나 준비된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처지에서 바라보든, 그 무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이름 모를 관객”이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아거). 아거님이 말하고, 민노씨가 되새겨 준, ‘무대의 배우론’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 무대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앞선 글에서 내비쳤던 것처럼, 전 지구적인 자본의 지배와 그 행태의 하나인 상품화와 소비주의 문화에 대한 고민 탓일까? 그 무대가 종종 드리우는 어둠에 자꾸 의심을 둔다. 예를 들어, 입바름으로는 진보이고 산뜻한 논리와 언술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어떤 이들의 주장은 ‘노이즈 마케팅’ 같은 어둠에 기대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는 ‘신상'(품)스러운 주장으로 격정 어린 찬반의 싸움을 불러 일으키는 사이, 보아야 할 것들은 이미 저만치 숨어버리고 만다. 그 소비자의 분주한 입출입을 관전하는 사이, 정작 숨죽이고 있어서 세심한 시선이 아니면 놓치기 쉬운 여리고 선한 것들의 면밀한 선과 결은 ‘쌘드뻬빠’로 사정없이 밀려나간다.
어쨌든, 이 맥락에서 쓰인 ‘무대’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받아들이고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무대인 것은 자명하다.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피할 수 없는 배우의 운명으로 무대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안의 나는 ‘무대 체질이 아니다’라는 태생의 부끄럼증에 기대어, 그 무대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 방황 끝에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에서 순례의 천막을 찾았을 때, 신앙의 새로운 이름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평생 말없이 고민 많았을 마리아의 남편, 예수의 지상 ‘양’ 아버지 ‘요셉’이 마음에 다가왔다. 역사라는 무대에 잠시 나왔다가, 어느 순간에 소리 없이 사라졌던 그 사람 요셉을 내 안에서 느낀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 생의 무대는 번듯하고 큰 무대는 아닐 것 같다. 그릇이 작은 탓이다. 그 무대가 주어진 것이라면, 유랑극단의 천막 무대 어느 한켠에서 나를 발견할는지 모른다. 인기 배우의 등장을 준비하고, 관객의 더 큰 웃음을 위해 그들의 배꼽을 잠시 쉬도록 하는, 한 짬의 ‘땜통’ 배우. 슬프도록 어설픈 배우일 성 싶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그 작은 쉼의 시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쓸쓸하지만 넉넉한 일이다.
2.
다시 돌아와 생각한다. 세상의 여러 큰 힘들이 만들어 내는 힘과 게임의 구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사람은 그 안에서 끼워져 살아가야 하는 한편, 그것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 진입과 저항의 경계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편만 선택하도록 몰리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이것은 그 큰 힘들의 전략이 아닐까?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랗게 그어진 분열의 금을 밟을 때마다 가해지는 폭력과 싸움에서 그나마 지친 몸을 쉬지 못하여 피폐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이런 생각에 매달린다. 경계를 분리의 선으로 삼지 않고, 쉼의 공간으로 만드는 일. 경계의 지름과 사이를 넓히는 일. ‘사이'(betwixt-between)라는 회색의 공간. 주저하면서 큰 힘과 그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진입했다가도 빠져나와 발을 디딜 수 있는 여백. 온몸으로 저항하다 지쳐 ‘악’만 남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쉬고 충전할 수 있는 여유의 공간. 그곳은 지친 이들을 보듬고, 상처받은 이들과 더불어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발견하고, 남과 자신의 처지를 성찰하며, 새로운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사제직의 의미와 더불어 이러한 공간을 성찰한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는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성공회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2008)
그러니 내가 사제이든, 어느 유랑극단의 서푼 짜리 배우이든, 유일한 희망은, 아니 함께 만들어가야 할 밝은 희망은, 이 ‘사이의 공간’에서 어슬렁거리는 쓸쓸한 이들이 맞잡은 연대의 공간이다. 대화와 실천을 통한 연대를 경험하고 넓히는 경계의 지평이다.
March 9th, 2010 at 1:34 am
안녕하세요, 신부님. 블로그의 글을 잘 읽고 있어요. 글을 소리내어 읽어서, 그리고 읽으면서 느낀 짧은 감상을 제 블로그에 올려 보았어요. ^^ 트랙백으로 보내두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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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March 9th, 2010 at 12:36 pm
아, 이런 감동적이면서, 동시에 제 손과 목이 오그라드는 일을 하시다니. 감동과 감사와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게다가 엄청난 비문과 읽기 어려운 긴 문장 때문에 고생하셨으리라 생각해요. 다행히(?!) 재생이 안되더군요. 어쨌든 그 기회 삼아 문장을 조금 손 봤습니다. 감사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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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sol Reply:
March 9th, 2010 at 11:14 pm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소리내어 읽다보니글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음미하게 되는 것 같아서 참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올렸는데 왜 제 손이 오그라들지 않고, 신부님의 손이 오그라드는지 잘 이해가 안되요 ^^;; 아, 재생이 안되는 문제는 아직 원인 파악을 못했어요. 처음에는 됐었는데, 민노씨의 댓글을 보니 된 적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요, 지금은 저도 안 나오네요. 아무래도 손 보신 문장으로 다시 시도해보아야겠습니다~ 날이 밝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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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March 10th, 2010 at 1:50 pm
다시 올려주신 것 잘 들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들으면서 문체가 엉망이어서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 애 많이 쓰셨습니다. 미안하기도하고요.
블로거 서머즈님이 적어둔 생각을 발전시켜서, 이런 시도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좋은 글을 편하면서도 명확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해서요. 민노씨와 나솔님이 열어주셨으니, 관심 있는 분들이 지켜보고 참여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생각과 행동의 장을 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March 9th, 2010 at 6:36 am
제가 주신부님께 구하는 바는 세속이라고 단죄된 육체로부터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경계’에서 대화의 지평의 넓히는 과정이겠지요. 선을 긋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에서, 그 사이에서 서로 감싸안고, 살을 부빔으로써 그 육체 안에 존재하는 욕망 아닌 소망을 ‘발견’하는 과정, 그것을 현실이라는 때로는 멍청하지만, 너무도 가혹한 시스템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되살리려 노력하는 시도들… 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문득 신부님께서 바라보는 세속의 풍경들, 그 욕망과 소망이 겹쳐지는 어떤 순간들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바람이 생기네요. 늘 따뜻한 관심의 시선에 깊은 고마움을 전하며…
추.
나솔님께서 보내신 트랙백은
http://nassol.textcube.com/201
입니다. ^ ^
[Reply]
fr. joo Reply:
March 9th, 2010 at 12:39 pm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민노씨는 제 서툴고 모호한 글을 더욱 명확하고 한층 깊이있게 발전시켜서 요약 제시하는 능력이 있어요. ^^;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꼭 제게 다른 숙제를 주시는군요. 능력과 여력이 아직 닿지 않아 머뭇거리는 일들을 잊을 만하면 이렇게 콕콕 짚어 주시다니.
감사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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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1th, 2010 at 2:55 am
아, 감사합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한 건 아닌지 소심해하고 있었는데요, 오히려 고마워해주시고, 다른 블로거분들이 더욱 생각을 확장시켜주시니, 다시 한번 블로그에 대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
[Reply]
March 18th, 2010 at 8:38 pm
무대라는 말이 왠지 거북스럽다는 주신부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무대인 것은 자명하다.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피할 수 없는 배우의 운명으로 무대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는 대목에서 어빙 고프만의 무대위에서 관객과 상호작용을 할 숙명을 지닌 배우로서의 개인의 실존을 인정하시면서도, “여전히 내 안의 나는 ‘무대 체질이 아니다’라는 태생의 부끄럼증에 기대어, 그 무대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는 대목에서 신부님의 천성과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상에 우리 실존의 일부를 내던진 모든 사람들은 좋든 싫든, 용기있건 부끄러워하건 간에 이미 그 자체로 무대위에 오른 배우라는 점과 은퇴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관객들과 상호작용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전화 통화에서 강조했던 무대론에 대한 이야기가 자칫 이런 태생적 상호작용 관점을 벗어나 그 어떤 역할론이나 dominance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반성의 합장! ^^
[Reply]
fr. joo Reply:
March 18th, 2010 at 11:08 pm
아거님, 마음 깊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거님이 ‘반성’하실 일이 전혀 없는데요. ^^
실은 이 글에 깃든 생각은 아거님과 전화 통화 막바지에 하려던 말이었는데, 전화가 끊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글로 그 소회를 남겼을 뿐입니다. 게다가 민노씨의 글을 보고 아거님이 말한 ‘무대’ 이야기의 깊은 속내를 오히려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화 통화는 제게 큰 힘이 되었고, 천생의 ‘부끄럼증”을 빌미로 제게 주어진 일을 회피하는 제 모습에 대한 반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도전과 반성, 그리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제 자신의 자리를 좀더 선명하게 – 유랑극단의 서푼 짜리 배우로! ^^ – 식별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감사했고 기뻤습니다. 이런 생각을 좀 더 깊이 헤아리고, 좀 더 넓게 아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감싸고 있는 어둠에서 몇가닥 밝은 자리를 찾아보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언제 또 반가운 목소리로 만나죠. 평화의 합장.
[Reply]
March 28th, 2010 at 1:20 pm
[…] Standard Podcast [9:11m]: Play Now | Play in Popup | Download 블로거 나솔님이 주낙현 신부님의 글을 낭독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