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전례 공간의 형성
아침에 반가운 전화가 한국에서 걸려왔다. 이곳 한인교회에서 함께 하다 돌아간 프란시스의 전화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현재 출석하는 분당교회의 교회 이전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생각이 한국성공회 내의 교회 건축과 공간 배치 등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졌다. 짤막하게 공부한 것들과 경험한 것들이 이 상념과 겹치길래 아침 나절에 메모를 하고는 프란시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다른 이들도 관심이 있을까? 부활절 아침에 통화한 이선우 신부님의 일갈이 떠올라 여기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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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구성이라는 말보다는 “형성“이라고 쓰는데는 기본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조성이나 구성은 누군가의 의해서 의도를 부과하여 만들어내는 같은 느낌이 묻어오는데, “형성“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어떤 것이 자라서 태어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사전적 정의로 구별하지 않겠다는 이 말은 또 아래에 주절거리는 것들이 내내 어떤 분야의 전문적 식견이라기 보다는, 전례를 공부하는 한 사목자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간의 형성“과 관련된 아주 느슨하고 두서 없는 생각을 실제 제가 한국에서 경험한 실내 리모델링 교회, 개척 교회들에 대한 인상 속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아주 추상적인 접근에서 소심한 접근까지 격의 없이 춤출게 당연합니다.
1부: 공간의 형성
1. “형성“이라는 말 속에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공간은 그 공간에 모이는 이들이 그 안에서 경험하는 어떤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수직적으로 그것은 절대자 혹은 하느님과의 만남이고, 수평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그 예배 공간에서 의미가 태어나는 것이고, 그 의미가 예배의 공간을 형성한다.
2. 그 만남의 경험들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할 터이니, 당연히 예배의 공간이 형성되는 방법도 다양하겠다. 예배 공간의 어떤 실체적 모델이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다.
3. 수직적인 하느님의 만남이나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의 만남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가 “하나의 몸“을 이뤄서 하느님을 만나기때문에 이것은 늘 교차된다. 아, 우리 앞에 그 중요한 상징이 있다. 십자가…
4. 한국교회의 경우 너무 수직적인 만남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강해서, 이것은 대체로 개인주의적인 신심으로 협소해지고, 성직자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위주의를 강화한다. 또 수평적인 교회 공동체의 사귐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이게 생일 잔치인지, 끼리끼리 계 모임인지 구별이 안될 수도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분리할 수 없는데, 나는 공동체가 모여서 “우리라는 개인“을 만들어내는 경험이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인 하나“가 바로 하느님과 만난다.
5. 이런 점에서 예배 공간의 형성은 늘 공동체의 경험에 기반을 두었으면 좋겠다. 이 교회는 주교의 교회도 아니요, 한 사제의 교회도 아니고, 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6. 그러니 공간은 몸으로 자라나고 형성된다. 똑같아도 똑같지 않은 우리 몸처럼… 속살처럼 나와서 자라나기도 하고, 늙어 죽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부활한 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는 우리의 삶과 닮았지만, 시간에 따라 자연사하는 공간은 아니다. 부활하는 공간이요 영원한 삶의 공간이겠다.
7. 이런 허튼 소리를 빈 머리에 떠올려보는 것은, 교회 예배 공간의 리모델링에서 최소한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경험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를 확인해보기 위해서다. 교회 리모델링은 사제와 몇몇 건축위원회 지도자가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작가 개인의 작품도 아니며, 인테리어 시공업자의 작품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공동체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 공간 안에서 내내 손님이 될 것이다. 하기야 요즘은 손님으로만 받아주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8.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교인들의 신앙 경험 – 물론 이건 개개인의 신앙 경험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진 우리의 신앙 경험이다 – 에 기반하도록 해야겠다. 사제는 교회의 선교 사명과 이것을 대화하게 하고 잘 조화시킬 책임이 있다. 하기야 늘 그게 어려워서 문제인게지… 그리고 이런 점들에서 건축/리모델링을 교인들의 신앙을 경청하고, 신앙을 공동체 안에서 다시 생각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새롭게 “형성“되는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이 없어 “예배 공간의 형성“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9. 예배 공간은 못박힌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님의 몸이다. 벽을 뚫고 여기 저기를 통하는 몸이다. 우리도 이 예배 공간을 통해서 그런 “우리인 하나“의 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 예배 공간이 상황에 따라 그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용 가능할 수 있도록 고려해서 융통성있게 배치해야 한다. 절기마다 조금씩 예배 공간의 배치를 바꾸는 것도 좋다. 우리는 살아움직이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2부: 기도서로 기도하는 성공회
1. 교회 전통마다 특징이 있지만, 성공회는 최소한 “기도서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갖고 산다. 그게 우리의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은 늘 양면적이지만, 사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참 많다. 그것은 마치 정교회 어느 아이콘처럼,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 있다.
2. 기도서를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인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도서의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예배의 행동과 구조를 통해서 “우리인 하나“가 되는데… 이건 흔히 말하는 매뉴얼은 아니겠고, 달리 말해서 “권법 비서” 같은 것일 게다. 내용은 다 있지만, 그에 따라 수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수련의 첫 방법이야 그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 깃든 복잡한 저간의 사정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예배의 공간에, 위험하긴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적용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4. 기도서가 말하는 공동체 예배는 기본적으로 매일기도(아침, 저녁기도: 성무일도)와 성찬례라고 하겠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른 특별예식이다. 매일 기도의 공간은 공동체가 매일 기도를 하는 조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한국교회의 사정은 그렇지 않으니, 우선 성찬례에만 집중하면….
5. 성찬례는 기본적으로… 입당예식 – 말씀의 전례 – 성찬의 전례 – 파송 예식으로 구성된다.
6. 이 구성을 생각하면서 말씀과 성찬이 우리 예배 공간 형성의 핵심이 된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이다.
7. 그리고 이 두 부분은 따라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관계한다. 성공회의 설교는 부흥회의 설교가 아니라, 전례적 설교이다. 다시 말해 늘 성찬례의 상황을 염두하면서 선포되는 말씀이다. 또 성찬은 그 설교에 반응해야 한다. 이것은 전례 자체의 구성과 준비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예배 공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보라! 우리의 설교대와 제대는 어떻게 관계하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되지는 않는가? 설교대와 제대가 대화하게 하라. 이게 우리 성공회 기도서의 예배 틀이 알려주는 지침이다.
8. 입당예식과 파송예식도 예배 공간과 함께 배려해야 한다. 누가 입당하는가? 예배 드리러 내가 입당한다. 그리고 십자가 (혹은 부활초)와 복음서와 예배의 봉사자들이 입당한다. 나는 왜 입당하는가? 입당의 준비는 무엇인가? 고전적인 교회에서는 세례대가 입당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입당하면서 성천(세례대)에 손을 담가 성호를 그으며 자신의 세례 서약을 되새김한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이 공간에 들어서, 개인이 아니라, “우리인 하나“가 되려고 왔다. 몇몇 교회들에서는 제대로 된 성천을 쳐박아 두고, 입구에 아주 작은 무슨 새 물먹이 종지를 갖다 붙여 놓고 있다. 성천의 실제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세례베풀 때? 그리고 나선 용도 폐기? 그러면 세례도 그냥 교인되는 일회의 행사로? 그 다음 세례의 서약은 용도 폐기? 공간의 배치는 이렇게 마음 가짐과 직결된다.
9. 파송은 공간적인 구성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것을 교회 전체의 특별한 전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 미국 성공회의 여러 경험에서 보면 파송 선언은 대체로 전례봉사자의 퇴장이 있고 난 뒤, 파송성가가 끝난 뒤, 교회 입구에서, 교인들이 모두 뒤로 돌아본 상태에서 – 다 복음을 전하러 나갈 준비가 된 자세에서 – 진행된다. 전례적 행동이 예배 공간을 변화시키는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10. 앞서 말한대로 기도서에는 공동체 예배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도 생활도 인도한다. 그러면 예배 공간은 이런 개인 기도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 큰 고전적인 성당은 그 자체로 개인적인 기도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하물며 작은 교회의 비좁은 공간에서라야…. 교회에 찾아 올 때 혼자서 기도할 수 있는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라는 것이겠다.
3부: 자잘한 단상들
1. 몇몇 교회들 – 대체로 작은 개척 교회들 – 을 방문하면서 솔직히 예배 공간과 관련해서 실망한 일들이 너무 많다. 첫인상은 천편일률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공간의 크기, 의자의 형태 – 개인의자, 접이식, 장의자 – 벽의 색깔, 십자가의 크기 등 뿐이다. 형태 상의 천편일률과 신학적 이미지의 일치는 전혀 다르다.
2.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작은 공간에 비해 생뚱맞게 큰 십자가, 큰 제대, 큰 설교대… 비좁은 배치… 왜 이렇게 큰 걸 들어놨느냐는 질문에, 교회가 성장하면 더 넓은 공간으로 가야 할텐데, 그러면 새롭게 마련할 수 없으니 그때에 대비해서… 가난한 어린 시절 부족한 살림에 오래 입게 하려고 큰 옷을 사주신 어머니의 마음이 지금도 아려오지만, 이게 교회의 유기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런지는 정말 모르겠다. 예배의 공간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지, 내년에 있을지도 모르는 만남을 위한 것은 아닐게다.
3. 왜 한국성공회 교회들의 벽마다에는 십자가의 길(14처)이 즐비하여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가? 누가 한국성공회에 이런 십자가의 길을 도입해서 크기도 적절하지 않고, 사실 미적인 감각도 없고, 전례적인 시간의 흐름과도 닿지 않은 내용들을 벽에 덕지 덕지 붙여 놨을까? 혹시 “모든 성공회 건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허튼 주장에 따라 서울주교좌성당을 본딴 것일까? 누구 언제부터 그곳에 그걸 붙여 놨는지 모르겠지만, 십자가의 길의 유래에 대해서 간단히 알고나 하는 것일까? 제발 14처를 떼어내시라. 없다면 제발 사지도 말고 붙이지도 마시라. 그래도 살 돈이 남아 돈다면, 여기 공부하는 가난한 사제에게 보탬을 주시라. 그도 아까우면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의 길“(14처)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셔서 부족한 성공회 신앙 프로그램의 뗌빵이라도 하시라. 다른 대형 교단 프로그램 기웃거리지 마시고…
4. 십자가의 길 14처를 떼어내서 허전하다면, 그 교회의 신앙을 보여주는, 혹은 예배의 공간이 이미 누구와 함께 채워져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백한 상징의 그림을 걸어 놓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체 교인 공동체의 사진을 해마다 바꿔서 한쪽에… 그리고 정교회 아이콘을 권장한다. 많이는 말고 작은 교회에서는 두 개 정도면 충분하다.
4. 성천이 있다면, 제발 성천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물도 준비해 놓고, 부활 시기에는 가능하면 성천 옆에 부활초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번쓰고 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세례대는 설교대, 제대와 함께 예배 공간 구성의 필수 요소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천의 위치는 유동적이다.)
5. 십자가는 교회의 크기가 맞도록 해야 한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 되는데, 아무리 봐도 큰 십자가를 사용할 만큼 우리 성공회 개척교회가 성장할 것 같지는 않다. 설명 그렇다해도 십자가가 너무 크다. 예배 공간에서 십자가는 제대–설교대–성천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다. 전통적인 예배 공간에서는 제대가 십자가를 제어한다.
6. 제대 – 설교대의 크기는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둘의 대화를 위한 배치도 중요하고, 그 크기도 중요하다. 또 모양도 중요할 텐데, 교회 공간의 배치에 따라서 이들의 모양이 전혀 달라 질 수 있겠다.
7. 촛대는 늘 제대 위에만 두개를 놓아야 하나?
8. 설교대 양쪽에 촛대를 놓을 수는 없나? 입당시에 들어가는 촛대는 도대체 입당 뒤에 어디로 숨나? 복음서 독서에 잠시 나타났다고 다시 사라진다. 오히려 설교대 옆이나 양쪽에 둘 수 없을까? 복음서 이후의 설교는 “살아있는 성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9. 성막(감실)과 관련하여: 한국성공회는 거의 모든 교회에 성막을 마련하는데, 그 실제 쓰임새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없어도 된다. 아니면 초대 교회들이 했던대로 제대 안에 설치를 하든지…. 필요하다면 그것이 신앙 생활에 주는 의미를 따져서 설치했으면 한다. 나는 감실 설치를 반대하는 편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체조배와는 다를지라도 앞서 말한 개인적인 신심의 공간으로서 교회 공간 안에서 사용되기를 바란다.
10. 개인적인 기도 공간은 내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예배 공간 한 쪽에 제대의 중요성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선에서 감실과 아이콘, 그리고 개인 붙여 봉헌할 촛불 등을 배치해서 – 혹은 향을 준비할 수도 있겠다 – 혼자 와서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다. 또 이 자리를 고해성사의 자리로 사용해도 좋겠다. 천주교에서도 고해 칸막이 쓰는 일은 옛일이 되었다.
11. 더 자잘한 이야기 하나 더 – 작은 교회들이 성물 구입에 지출하는 돈을 보고 놀란 적이 많다. 성작과 성반을 왜 그렇게 좋은 금박이로 사야하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그랬을 턱이 없고, 사실 그 돈이면 좋은 도자기 성작/성반 몇 벌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예전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깨질 위험이 있다면, 여벌로 싼 성작/성반을 마련할 수도 있겠고, 색깔 바랬다고 쓰지 않고 굴러다니는 다른 교회들의 성작/성반을 수선해서 쓸 수도 있다. 그 고가의 수입품에 달러를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사제서품 기념으로 스테파노 수사님이 구워주신 도자기 성작/성반은 절친한 감리교 목사님께 강탈당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4부: 사제와 건축/리모델링 위원회
1. 성찰하시라. 공부하시라. 상담하시라. 경청하시라. 기도하시라. 경험하시라.
2. 이런 위원회 활동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이지, 자신의 일을 하나 더 만들거나, 혹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3. 많은 자료들을 보되, 우리 교회의 전통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전문가들과 상담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신앙 생활과 그들의 경험을 반영하면서 논의를 진행해야 겠다.
4.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사제와 건축/리모델링 위원회는 정기적으로 가서 그 아무 것도 없는 빈자리에서 묵상하히고 예배를 드려보시라.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배치를 하루에 몇번이고 바꿀 수도 있겠지만, 헌 상이나 탁자를 두고서라도, 그 한번씩을 직접 예배드리는 경험으로 그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바란다.
5. 기록의 문제: 나는 기록에 정말로 약한 사람이고, 기록은 성실한 사람의 잣대이기도 하다. 1년 전 같이 공부하던 어느 신부님의 집에 놀라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장인 어른이 약 30여년 전에 지은 집을 다시 수리해서 살기로 했는데, 방문했을 때 이미 신부님 부부가 거의 다 리모델링과 수리를 마쳤다. 그는 우선 장인 어른의 30년 전 건축 기록을 보여 주었다. 사진 앨범 크기의 약 500여 페이지 되는 그 일기장에는, 건축 과정의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어느 비오는 날 아침 배관공이 30분 늦게 온 일까지도… 그 신부님은 그걸 보고 혼자서 다시 리모델링했고, 관련 일기 편마다에 자신이 고친 것들을 다시 붙여 놓았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이지만, 흉내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6. 누구도 만족할 수 없다. 건축/리모델링의 결과에 만족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이면 백 모두 자기 의견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고 있느냐 하는 것이며, 그 안에 초대할 사람들과 함께 서로 자라날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겠다.
April 23rd, 2006 at 11:31 pm
감사합니다.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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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4th, 2006 at 9:40 am
나신부님… 어젯 밤 즐거운 대화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종종 바닥의 소식 좀 전해주세요. 그나저나 신부님 설교 1년 넘게 업데이트가 안돼서 아쉽다는 말씀드리려다가 어제 빼먹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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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4th, 2006 at 6:16 pm
네. 신부님 좋은 성찰의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의 양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간 형성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시작점은 있어야 겠기에 제가 그 역할을 할것같습니다. 예배실이외의 다른 공간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비젼도 같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을 정리해서 다른 신자분들과 나누겠습니다. 다들 문제의 중대함을 인식하시고 계셔서 좋은 자리가 될 것같습니다. 과정을 기록하는 교회블로그를 만들까하는데요. 좋은 생각 나눠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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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4th, 2006 at 6:51 pm
바닥으로부터 뭔가 자극이 있어야 그 대응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자극을 줘서 고맙습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기도하고 경험하고 논의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블로그를 통한 기록… 그거 바라던 바였습니다. 다른 분들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겠지요.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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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5th, 2006 at 12:15 pm
주 신부님, 복되고 희망 넘치는 부활 대축일 맞으셨기를 빕니다.
이렇게 좋은 묵상 나누어 주심 감사드립니다.
모교회의 예전적 교회로의 변모를 꿈꾸는 저로서 신부님의 통찰들이 마음에 많이 와 닿고 또 경탄하게 됩니다.
자주 참여하지 못함 해량하여 주시길 바라며, 또 좋은 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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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7th, 2006 at 10:16 am
루시안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성과 예배의 뿌리에서 감리교와 성공회가 교차하고 서로 배울 일이 많겠지요. 그런 서로 배움의 기회가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막판 논문쓰기에 큰 진척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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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8th, 2006 at 11:29 pm
주낙현 신부님, 정말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신부님의 글들 재밌게 잘 읽었고 생각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요즘 대학로교회의 재건축 이야기가 다시 나와 온교회가 들썩들썩 하는 터라 신부님의 고민들이 더 와닿았습니다. 결국 재건축이 결정되었는데 재정적인 문제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신부님 말씀대로 대학로교회 재건축이 “교인들의 신앙을 경청하고, 신앙을 공동체 안에서 다시 생각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주신부님과 가족 모두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프리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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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8th, 2006 at 5:52 pm
앗! 이주영 선생님… 참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십니까? 요즘 소식이 없어서 어디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군요. 아, 이 무심한 사람 용서하십시오.
대학로 교회 재건축이 확정되었군요.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 전에 현재 대학로 교회 건축물에 대한 자료들을 잘 정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원도연 선생님이랑 좀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몇몇 석사 학위 논문도 있고, 또 어느 건축 잡지에 실린 좋은 글도 있어서, 읽고 복사해두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모든 짐들을 시골 집 창고에 넣어 놔서 어디에 쳐박혀 있는지 몰라요. 앞으로의 건축 계획도 중요하지만 어떤 뜻과 선교 사명으로 현 건물이 들어섰으며, 어떻게 이용되고 변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새로운 성당 건축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여튼 자주 연락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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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1th, 2007 at 8:26 pm
[…] 성서정과(Lectionary)에 따라 주일 설교를 하는 것이 모두 전례적 설교(Liturgical Preaching)는 아니다. 말 그대로, 전례라는 전체 맥락에 위치하여 성서가 전하는 선포와 성찬례가 요구하는 우리 삶의 봉헌과 변화를 매개하는 것이 전례적 설교의 간단한 정의겠다. 최소한, 성공회에서는 대부분의 설교가 전례의 맥락 속에 위치하기 때문에, 되도록 이러한 전례적 설교의 정의를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의 예배가 아니라, 설교와 예배가 혼동스러운 예식과 외적인 형식에 초점을 둔 성찬식이라는 두가지 예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문제는 여러 교회들에서 자주 보인다. (참조: 예배-전례 공간의 형성) […]
March 20th, 2007 at 6:45 am
카페(예전학 배움터)에 주소 올려놓고, 가끔씩 들어와보는 감리교 목사입니다. 예배공간은 시간에 따라 자연사하는 공간이 아닌, 부활하는 공간이요 영원한 삶의 공간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못박힌 십자가가 아닌, 벽을 뚫고 여기 저기를 통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씀도… 그러고보면,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이다’라는 말보다는 ‘사람과 건물이 어우러져서 부활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뜻을 생각해보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이 글을 저희 카페에 소개해도 될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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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th, 2007 at 12:47 pm
선우 혁(목사님?!)님, 반갑습니다. 참 좋은 인터넷 자료 공간을 운영하고 계시더군요. 좋은 자료들을 함께 섭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을 하는데는 무엇보다도 “공감” 혹은 “공명”이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런 “함께 울림”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옛 블로그에 올라온 코멘트를 새로운 주소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소개하는 것은 괜찮으나, 이 글이 성공회 아닌 다른 교회들에게도 도움이 될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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