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의 신앙

늦은 감이 있지만… 작년 성탄절 직후에 아시아에 덮친 쓰나미로 인한 참상은 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에게 먼 나라 일로만 잊혀지고 있을 때, 느닷없이 튀어나온 “비기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 일들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격월간 “공동선”에서 펴내는 특집의 꼭지로 싣도록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님의 신문 기고 글을 번역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도 이런 혼동과 경악이 겹치는 지점에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해야겠다는 까닭이었습니다. 출간일에 맞추어 인터넷에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공동선 관계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재난 속의 신앙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지금 우리 곁을 따라다니는 것은 한결같이 특별한 얼굴이 담긴 사진들입니다. 거기에는 한 어머니의 비통함과 한 어린 아이의 당황스러움과 외로움이 악몽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 주 캔터베리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재난 속에서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죽은 14살 난 어린이의 죽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일어난 일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우리를 경악케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담긴 상실감과 공포였습니다.

1966년 애버판 재난[역자주:애버판 재난 Aberfan Disaster: 1966년 9월 21일 웨일즈 남부에서 탄광마을에서 일어난 사고로, 폐탄 쓰레기의 산사태가 마을과 학교를 덮쳐 144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116명이 어린이였다]이 닥쳤을 때,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에 텔레비전에서는 하느님과 고통에 대한 토론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통치에 대한 본질적인 불신과 어떤 경악스러움과 함께,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믿음을 통해서 건네보려는 어떤 위안의 말들도 공허한 말 잔치로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다만 내 마음에 닿았던 것이 있다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당시 웨일즈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감히 내가 무언가 언급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다만 내가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참혹한 일을 설명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성서의 말씀들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나를 향한 그 깊은 뜻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분은 자식을 잃은 경험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보다 훨씬 큰 비극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경험 때문이었지, 그분이 좀더 나은 이론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큰 재난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큰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지적이고 세련된 설명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뜻밖의 죽음은 어느 때나 위로를 건네려는 신앙을 뒤흔들고, 이미 준비된 대답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우리를 마비시켜버리는 재난에 직면하면서, 우리는 당연히 마음 속 깊이 분노하게 되고, 한편으로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좀더 나은 쪽으로 만들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다만 마음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그저 이 일들과 직면할 뿐, 이런 일들을 없애버리거나 우리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이제 이런 의문이 다가옵니다.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허용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순간 이런 의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사실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될 것이고, 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전통적인 답변은 우리를 잠시 한가지 깨달음으로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듣던 대로, 하느님은 인간의 행동이나 세상의 진행 과정을 꼭두각시 인형 다루듯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만들어내는 대로, 그리고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삶의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의 일이라는 것도 일정한 순서와 그 나름의 방식대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원인은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늠하고, 이에 대처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위험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될 때, 하느님의 개입을 기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면 왜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도움과 치유를 바라며 기도할까요?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셔서 변화시키는 행동을 취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신앙인들은 기도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세계를 완벽하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마술적인 해법에 대한 청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참화를 한 주일 동안 지켜보는 처지에서 더 이상 이런 가르침이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어떤 위대한 종교인이 이런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이 좀더 행복해지고 혹은 평안함을 느끼고, 하느님에 대한 좀더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될까요? 아니면 이런 재난에 어떤 깊은 연유가 있어서 하느님께서 그것을 계획했노라고 하면서 으스스한 하느님의 심판을 느껴야 할까요?

정말 놀라운 사실은 신앙이란 이러한 시험을 거듭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어떤 위로를 베풀거나 혹은 그 연유를 설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자기 앞에 주어진 것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값없이 주어진 선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한계 밖에 있는 어떤 부름과 초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라는 부름에 응하여 그 자비를 다른 사람을 향하여 실현시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오직 경이와 침묵으로만 응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제 멋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간 경험 속에서 처절하게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여전히 이러한 확신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위로와 어떤 편안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삶의 그러한 실체와 마음의 본질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지극히 중요한 연결점이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하느님께서 이끌어내시는 어떤 경이와 침묵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신앙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 즉 하나 하나의 생명이 가진 존귀함을 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이 역설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종교적 신앙의 길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하나의 생명,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 열망으로 인해 종교적 신앙인들은 사회가 낙태와 안락사에 대해서 토론할 때 불편해 하고 완고한 고집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에 대한 열정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의 재난 속에서 전율을 느끼고, 마음에 깊은 도전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세상의 윤리학자들은 현대의 여러 논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본성을 따지는 것은 쓸모 없는 것이며,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시각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보기에 쓰나미와 같은 재난 속에서 고통 당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귀함이 우리 마음을 만 갈래로 찢어놓기 때문입니다. 어디에도 “여분의”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신앙인에게 맡겨진 응답과 행동은 이렇게 남아 있는 생명들과 열정적으로 연대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반응은 지적인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열려 있는 길 속에서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특이한 사실은 이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나 이를 돕는 사람들처럼 이러한 응답에 깊이 투신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어떤 부족한 설명을 메우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우리가 쥐어 짜내려는 거창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물음들을 경시하는 것 같고, 이에 대해 서투르고 논리 정연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되어야 할 어떤 용기와 비전에 대한 깨달음이요, 봉사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명령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런 처지 속에서 하느님은 이들에게 그저 하나의 신실한 현존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찬성과 반대”의 논쟁은 이렇게 서투르면서 고집스러운 맥락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참혹한 사태에 대해서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은 그 고통에 가장 맞닿아 있는 이들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위해 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낙현 신부 역)
영국 Sunday Telegraph 2005년 1월 2일
격월간 [공동선] 2005년 3월호

One Response to “재난 속의 신앙”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하느님과 인간의 고통… 오직 모를 뿐! Says:

    […] 전, 전 세계를 아프게 만들었던 쓰나미 재앙에 관한 성찰을 우연히 듣는다. 번역해서 올렸던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글도 언급되거니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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