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1.
매일 기도하고 있으나, 부끄러움과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어떤 말도 잘 터지지 않았다.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한국에 계신 몇몇 신부님들께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과도 깊은 한숨을 나누었다. 모두들 경악했고 슬퍼했다.

이 공유하는 충격 속에서 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나 역시 그 사람 노무현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몸담고 있는 사목 현장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와 교단에 따라 어떤 분기점들도 보였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경우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든, 한탄하는 것이든, 답답해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제 생각들을 속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이야기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고들 한다. 이미 수구 꼴통들은 교회의 가르침입네 하면서, 자살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말로 정치적인 언변을 설교랍시고 묵상이랍시고 교활한 정치적인 선동을 뿌려 놓는다. 많은 이들이 신자랍시고 그 말들에 부하뇌동한다. 그리고선 이 죽음에 대해 그저 인간적인 애도만 표명해도,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인다느니,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말로 응수하고 공격하기가 일쑤란다. 움추릴 만하다.

2.
그런데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사목하고 목회하는 일은 신앙적인 언어도단이 아닌가? 신앙은 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진댄, 교회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탓에 어떤 반성과 성찰을 위한 도전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더라도, 한참이나 김빠진, 맥없는, 하나마나 한 입발린 말들은 나 같은 사목자들 스스로를 그 심연에서 비참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비참 속에서 우리 교회는 “끼리끼리의 사교 클럽”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등급이 명확하게 매겨진, 강력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런 사교 클럽. 그러니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하다는 말도 다들 헛소리이다. 아직 다양하기라도 하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을 터.

그러니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슬기와 순결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경륜이라고들 한다. 젊은 것들은 거기에 좀 머리 좀 숙이라고 다그친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경륜을 가장한 타협과 기만과 위선과 노회함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도, 격려도, 조언도 아니다. 또 다른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순결”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고, 공동번역에서 “양순하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뜻대로라면 ‘순결’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라면 “단순/단호하라”는 말이겠다. 때묻지 않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면서 어찌 모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고민 속에서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우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숨기며 짐짓 뻐기고 있는 태도에 허를 찌르라는 말로 들어야겠다. 내 폐부를 찌르고 가르는 그 날카로운 도전이 이 슬기로운 우회의 과정에서 무디어지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3.
나 같은 신앙인들에게 돌아오는 수술용 칼날은 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위선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가없은 욕망을 치장한 이 위선으로, 우리는 몇년 전 대단한 위선의 흉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우상은 한때 권좌에 있던 이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런 그 탐욕의 우상이 보통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감추려는 위선은 우리의 눈도 가린다. 눈먼 우상은 살아 있는 이가 이미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다. 우리의 뒤틀리고 벌거벗은 욕망이 이 무소불위의 눈먼 권력을 낳았고, 지금 우리가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물이 나의 위선을 씻어내리는 회개와 세례가 되지 않고서는, 이 슬픔에 찬 분노도 이미 거만하게 우뚝 서버린 흉물스런 우상 앞에서 맥을 쓸 수 없다.

4.
이런 거친 심정때문이었다. 마음 깊으신 한 신부님의 “말-씀”에 토를 달며 투정을 했다. 그것 말고는 침울하게 산란한 내 마음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침묵해야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공이 얕고, 도에서 먼 지라, 털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투정을 고쳐 옮겨 놓는다.

이 참담한 사건에 직면한 마음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도 잘 안나오고, 한편으로는 참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사목자이신 신부님의 처지를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슬픔에 기대어 투정을 좀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부분인 오늘의 본문(요한 17:6-19)을 요약하는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 주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우회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좀더 분명한 표현은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만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속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의식 속에서, 훨씬 예언자적인 표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많은 경우에는 세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들을 제가 명민하고 사려깊으신 신부님의 글에서 – 글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걸 알지만 – 쥐어 잡을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너머’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즉 우리의 위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별사가 예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어떤 위대한 구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편만한 위선의 폭로였습니다. 그 폭로인 그의 죽음에 우리를 비춰보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위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죽음은, 그래도 그나마 인간적이어서 정직하려고 몸부림쳤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신앙인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고라도 신앙인들은 이 점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의 성찬례에서 신앙인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고, 그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이 용기와 기쁨을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그동안 우리의 위선을 포장하거나 치장하는 메이크업 가게가 되었고, 우리의 음란한 욕망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흉물이 바로 2mb와 그 졸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종교인, 게다가 대형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어떤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한, 어떤 “우회”가 빈말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이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면서, 성직에 든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리고 그 기념일에, 제 자신에게, 제 동료 성직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교인들과 바닷가에 나와 거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입에 들쳐오는 모래를 씹으며 거듭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3 Responses to “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1. 로자 Says:

    !!

    [Reply]

  2. Says:

    1.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 말 중에 “국민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통과 국민들의 고통이 서로 통해서 그런 것 같다”(정확한 인용은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많은 슬픔들이 우리의 집착이나 극히 개인적인 자기연민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슬픔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마음 깊게 추구하고 있었던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의 실종 그리고 이 가치와 이상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버리기까지 했었던 전체로서의 우리의 무기력함, 더불어 지극히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집착과 이에 대한 추구라는 이중성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2.
    저는 한국인의 냄비정신을 이 계기로 다시 한번 탐구하고 싶습니다. 흔히들 냄비정신을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한국인의 얄팍한 심정을 비판하기 위해 표현하는 데 저는 이것에 결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감정이 빨리 달아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빨리 식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상에 대해 사적인 집착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냄비정신을 몽골정신이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몽고인들은 전쟁 시 뛰어났던 면 중에 하나는 필요할 때 순간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데 유연한데 있습니다. 집중과 분산이 자유롭다는 거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장점만을 갖고 있었던 전술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3.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할 때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집단적으로는 강한 반면, 한국인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집단적으로는 모래알 같다라는 분석을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볼 때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평가는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최근 위기 시나 큰 민족의 행사 시 온 국민이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저번에 주 신부님께 블로그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유치원이전의 아이들)이 대부분 혼자 놀지만 때때로 필요해 의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아니 인간성 자체에 대한 위협에 대한 방어로써의 집단주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개인주의는 역사성을 무시한 체 자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쾌락주의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4.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따른 단시간의 방어와 항거가 커다란 역사적 방향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냄비정신이라는 단어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활활 끓어 올라서 혁명까지 완수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경향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저는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믿고 있습니다. 진화의 과정은 항상 불연속과 평형의 단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 있는 인류의 진보는 제자리로 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의 존재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합생, concrescence의 단계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한민족의 역사적 진보를 믿고 있고 다음 단계로의 전이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측하건대 꺼지는 단계가 있을 것입니다. 에너지의 속성상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를 수도 없고, 그러나 만약 이를 위해 극우와 극좌가 이 사건을 이용한다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진보는 후퇴할 수도 있다고 예측해봅니다. 그러므로 꺼지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에서 개개인의 각개전투가 중요합니다. 아니 전투가 아니라 개개인의 춤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진보 아니 흐름이라는 음악에 나는 나만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나누는 전투가 아니라 나와 너의 통합이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춤입니다. 이 춤은 역사에 대한 인위적인 행위에 대한 좋은 대체가 될 것입니다.

    5.
    “악어”님께서 소개해준 링크에 들어가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얻은 통찰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소그룹 운동의 중요성과 이 소그룹 운동을 통합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물과 그 인물이 선포하는 실용적인 메시지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여기에서 더 이 그룹운동에서 깊게 연구해야 될 것을 꼽는다면 이 운동에서 나오는 긍정의 에너지입니다(이것이 미국 전반 문화에 흐르는 강한 흐름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기복적인 것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을 이 교회운동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적용을 시킨다면, 카리스마적 인물은 “노무현”이면 충분하며 그가 이루고자 했던 권위주의타파와 지역청산의 메시지 또한 그 운동의 실용적 메시지와 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주위와 우리가 속해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이러한 소그룹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6.
    저번에 주신부님께서 이야기했듯이 노무현씨가 외친 상식 없는 나라를 상식과 원칙이 있게 만들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방식이 틀렸다는 것에 공감하며,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비상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기독교단체의 긍정의 에너지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론에서 이가 기를 타고 일어난다는 쪽입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시스템, 방법)는 자연스럽게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긍정의 에너지는 권위주의를 타파할 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위를 하나의 문화로써 인정하고 이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며, 지역구조의 청산에 있어도 우리 안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차별의식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대한 부정의 에너지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 내면에서 솟아 오르는 긍정의 에너지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단순한 표면적인 통합을 가져오는 에너지가 아니라 내적인 통합 다시 말하면 내적인 용서와 화해가 선행이 우선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말하는 긍정의 에너지는 외부를 향한 긍정의 메시지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명상의 판단 없는 “나” 에 대한 관찰의 힘과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가 같이 기본적으로 고민해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화해가 타협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용서가 자기 처지에 대한 합리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느냐라는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끊임없는 공시적 통시적 고찰과 탐구만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될 수 있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문제만 생기면 해답을 도출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습관을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기에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보화시대가 잘못 작용할 때 천박한 문화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해답은 수 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해답에 있어 어느 정도 강도 있는 성찰이 있느냐는 것이죠.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강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을 통한 깊은 탐험과 탐구를 말합니다. 끊임없는 순수한 탐구의식과 문제 제기가 어떠한 특정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앞에 말한 긍정의 에너지와 더불어 요구된다는 이야기입니다.

    8.
    소위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자신이 무슨 틀과 방법을 만들어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의도가 무수히 우리 삶 속에 관찰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기는 이러한 의도 속에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 혹은 진보가 오도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가 우상화가 되고 예수의 죽음이 일반 민중의 죽음과 동떨어져 신비화 되는 과정에 지식인들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로 말하자면 노무현씨의 죽음과 정신이 신격화되고 일반민중의 삶과 동떨어지는데 이들이 일조한다는 것입니다. 즉 팩트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되고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팩트를 직, 간접적으로 죽인 자들이 이 과정에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왜곡이 생기고 이 왜곡에 수 많은 사람들은 세뇌당하는 불행한 현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추는 것이지 누구를 계도하려는 춤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청년부 “Doubt Night”을 이끌면서 느낀 것은 제 안에 누군가를 세뇌시키려는 의지가 끊임없이 작용한다는 것과 또 다른 한가지는 아무리 거칠고 순화되지 않는 언어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의견일지라도 자세히 보면 상당한 통찰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선입견 없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와 인정욕구를 최대한 조절한 들음의 자세가 소위 지식인들한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9.
    저는 한민족의 역량을 믿습니다. 아니 인간성의 진화를 믿습니다. 이 시대에는 “나를 따르라” 라는 리더쉽보다는 “낮은 자를 섬기는” 리더쉽에 기반한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리더쉽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낮은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 없이는 이 리더쉽은 또 다른 억압과 착취, 가학, 자학 그리고 합리화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ply]

    fr. joo Reply:

    홍 / 최근에 일어난 슬픈 사건에 대한 생각을 다양하게 확대시켜 주시는군요. 우선 저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 ‘홍’님이 진척시킨 내용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참에 ‘홍’님이 블로그 하나를 개설하면 어떨까하는데요. 그럼 좀더 넓은 독자들과 폭넓고 속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글에 대한 논평은 아닌 것 같지만, 공감하는 면들은 빼고, 몇가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 불편함은 홍님의 “개인주의”에 대한 생각과 어떤 “몽골”적 “민족주의”가 서로 부합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나옵니다. 게다가 언급하시는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은 여로모로 동의하기 어려워요.

    1. 이번 사건을 통한 국민적 슬픔이 민족적인 이상과는 별 연관이 없으리라 봅니다. 오히려 말미에 말씀하신 “이중성”의 어떤 위선이 좀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2,3,4. 냄비 정신과 몽골적의 유목정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탁월한 상상력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어떤 국민적 에토스를 어떤 유구한 내재적인 민족정신 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비약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5. 교회의 여러 다양한 운동과 관련해서, 아거님이 참조하라 일러주신 사례는 여전히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공하는 것들입니다. 그 이념적 틀을 벗어나, 이런 전략이 리버럴한 교회, 혹은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가능할 것이냐 아니냐는 좀더 실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작은 교회들을 통해, 혹은 그 연대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6.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보수를 얕잡아 보았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연구할 생각보다는 조롱하고 멸시하는데 진력했어요. 그들이 ‘노무현’을 조롱하고 멸시했던 것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이었을까요? 그런데 수구들은 이 조롱과 멸시를 자신의 에너지로 삼았어요.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수의 생존전략과 경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에만 제한한다면, 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이 뭘까 하는데서 아직 답이 안나옵니다.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세심히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배우기까지 해야 하지만, 전혀 새로운 교회/신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이유는 이미 그런 교회에서 벗어나서 떠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을 위한 좀더 획기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8. 먹물들의 젠체하는 태도들과 어떤 대중적 “우상화”의 위험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봐요. 특히 요즘같은 상황에서. 그렇다면 지식인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서로 깊이 관여하는(engage)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말씀하신 “Doubt Night”는 멋진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9. 흠, 제 낙관은 회의에서 출발하는 편이라, 어떤 “민족”의 역량이나, “진화”에 대한 생각은 ‘홍’님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밖으로 밀려나간 자들과 하는 삶에 꿈과 이를 위한 저항과 도전이 진실한 어깨동무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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