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아침 침묵 중에 슬며시 떠오른 회고를 옮긴다. 사제로서 지난 십수 년 동안 다양한 공동체와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성서와 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주된 초점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고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해당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일 터이나, 나이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 초점은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2) “용서, 사랑, 환대의 가치와 실천”, 3) “측은지심의 공동체”로 나뉜다. 그러나 같은 성서와 복음을 읽고 살피며 기도하는 처지인지라, 시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이 초점들은 언제나 겹친다.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전통적인 수도공동체에 초대받아 함께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며 나누던 복음 해석의 렌즈였다. 그 수도회가 갓 서품받은 사제를 불러 채플린으로 삼은 이유라고 믿었기에 젊은 혈기에 상당한 객기를 부렸고, 수도자들답게 늘 너그럽게 들어주셨다. 고정관념을 이겨내자고 말했지만, 수도자들의 너그러움과 공동체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2. 용서/사랑/환대의 가치와 실천: 풍비박산이 난 공동체를 타국 타향에서 만나서 돌보는 일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공동체의 내력을 들춰보니 온갖 비난과 미움의 상처가 엿보였고, 사람이 떠난 텅 빈 쓸쓸함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처지에 복음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환대하는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가진 것 없이 남은 쓸쓸한 이들의 겸손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내 소리 내며 살기고 했고, 종내에 내력이 지닌 하릴없는 쓸쓸함에 나 자신이 짓눌리기도 했다.

3. 측은지심의 공동체: 복음을 들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이 특정한 형태의 정치-이념적 주장의 외피가 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20년 넘게 지켜봤고 성찰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거기서 얻은 배움은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측은지심의 공동체’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흐르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선을 얻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드는 탓일까? 이런 공동체를 ‘리버럴’ 사이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과 초점의 변화는 하느님의 이끄심이리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돌멩이처럼 여기까지 왔다. 다시 차여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내 의지로 하느님의 자유를 종종 거부하지 않았는지 돌아다 본다. 그 기도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얼굴과 표정이다.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다. 지금 스스로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은 이것뿐.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감동을 줬는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어루만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언제 적었듯이, 그림자 짙은 그늘이 많은 내 삶. 다만, 그 안에 수줍은 작은 꽃들이나마 품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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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1. 자캐오 Says: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SNS도 이런 저런 경로로 사찰(?) 비슷한 걸 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게 지치고 귀찮아 지던 차.. 사제직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다시 힘내고 갑니다.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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