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한 영성주의

소위 “영성주의”의 폐해가 심각하다. 그리스도교 내, 아니 우리 교회 안 이곳저곳에서 영적 멘토니 지도자니 하는 ‘도통한’ 자들의 성서 이해와 영성 이해는 순진무구한 수준을 넘어 가히 자기기만의 수준이라 하겠다. 역사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성서 텍스트가, 유사 심리학과 뉴에이지의 풍의 근거 없이 야릇한 틀을 뒷받침하는 비유나 증거 구절(prooftext)로 전락하는 일이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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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가슴’을 울리는 듯한 화법과 언어적 농간을 유심히 들춰보면 여느 종교에서 흔히 보이는 수준 낮은 미끼와 비슷하다. 이를 깨달음이자 경지 높은 영성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행태가 가관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현실 인식이나 문제 해결 방식은 매우 얕거나 훨씬 타협적이라는 것. 깊게 살펴보는 척하면서 엄청나게 에두르는 화법은 궤변으로 판명 나고, 겸손한 듯 도통한 듯한 태도와 해법 제시는 현상 유지(status quo)이거나, 자기기만적인 타협이다. 자기기만에만 머물면 좋으련만 남들을 무시하는 거만함도 보인다. 자신의 눈과 귀가 막혔는지도 모른다.

이 태도는 비성서적이며 몰역사적이다. 그것이 어떤 신흥종교 풍의 영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육신의 영성이요, 그래서 육체와 역사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성이다. 여기서 한치라도 벗어날라치면 대체로 현대판 영지주의로 전락하거나, 그 안에서 도통한 체하며 스스로 만족하며 산다. 그들의 행복 선택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도전하고 변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스스로 곤두박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영성은 바로 이를 식별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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