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요한 20:19~31)1

17세기 화가 카라바지오의 그림 <의심하는 토마>는 우리가 당연하듯 생각하는 토마의 불신앙을 더욱 과장하여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토마는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자기 손가락을 후벼 넣습니다. 상상만 해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쓰라림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주변의 두 제자마저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상처를 파고든 손가락을 향합니다. 과연 토마는 자기 신앙의 증거를 찾으려고 남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doubting_thomas.jpg
(카라바지오, <의심하는 토마>, 1601~2)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직후, 제자들 사이에서 긴박한 대책회의가 있었을 법하지만, 가리옷 유다가 빠진 제자단 열한 명 가운데 왜 유독 토마만 빠졌을까요? 스승의 죽음에 절망하여 낙향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여드레 뒤에 그가 다시 제자단 모임에 돌아온 것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나타나 ‘네 손으로 확인하라’고 하셨을 때도, 토마는 카라바지오의 그림과는 달리, 곧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반깁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세상 밖을 헤매던 이가 아니고서는 이 반가움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정작 문제는 ‘무서워서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상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따른 자기폐쇄의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두려워 말고 평화가 있기를” 하며 건네신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인사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할 때 건넸던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도 들려왔던 말씀입니다. 같은 인사가 부활의 경험 속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안녕만을 위하는 일이 불신앙이요, 그러한 두려움을 넘는 일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닫아둔 벽과 마음’을 꿰뚫고 들어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이 들어오는 틈을 마련할 때라야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완벽하고 건강하게 ‘닫힌’ 몸과는 달리, 우리 삶에서 얻은 찢어지고 터진 상처야말로 하느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꿰뚫고 들어오는 생명에 자신의 상처를 여는 일이 용기이며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의 상처와 고통을 없애려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하여 삶이 지닌 고통의 깊이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 상처를 새로운 창과 렌즈로 삼아 세상에 즐비한 다른 상처와 아픔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아물지 않은 예수님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 세상의 고통과 만나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부활일부터 성령강림주일에 이르는 오십일의 부활절기는 터지고 열린 상처들이 만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가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가슴이 휑히 뚫린 자신의 상처를 안고 토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났습니다. 그 맞닿은 상처 안에서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 12일치(↩)

2 Responses to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1. John Dongjin Kim Says:

    역시.. 나하고 한편…

    [Reply]

  2. Minju Kang Says:

    주보에서 감사히 읽고 누가 쓰신 글일까 궁금했었는데, 신부님 글이었군요! 마음에 새기며 부활절기 잘 보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Reply]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