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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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는 신앙 (루가 8:26~39)

지난 몇 주일 동안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 이채롭습니다. 병든 하인을 염려하는 이방인 백인대장, 외아들마저 잃는 저주를 받은 과부, 그리고 행실이 나쁘다고 평판이 난 여인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이 모든 것을 합쳐서 ‘더러운 악령이 떼로 붙은’ 가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까이하거나 관심 두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행동이나 처지가 별난 사람들입니다. ‘부정한 이들’과 접촉하여 ‘오염’되는 일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오염’과 대면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정죄하고 피하는 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면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꺼리며 싫어하더라도, 바르고 옳은 일이라면 그리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생명의 치유와 회복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손해가 나더라도 감행하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만난 ‘마귀 들린 사람’의 처지가 참담합니다. 옷도 입지 않고 무덤 사이를 오가며 발작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며 괴력을 보이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깃든 갖가지 상징이 뚜렷합니다. 문명과 담을 쌓으려는 미개함, 절망과 죽음을 부추기는 문화, 바른 비판을 두고 참견하지 말라는 억지, 스스로 삼가지 못하여 멋대로 하려는 방종의 그림자가 어둡습니다. 이 ‘악령’의 이름이 ‘군대’라 하니, 당시로는 섬뜩한 이름입니다. 그때 ‘군대’는 포악한 식민지 점령군 로마 군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군대와 무기가 만드는 전쟁이 파괴하는 인간의 참상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오염’에 손을 대실 뿐만 아니라, 이제 ‘군대’라는 폭력의 힘과도 대결하십니다.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폭력은 어떤 것이라도 사람에게 붙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폭력을 당하는 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약한 이들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신앙인은 이런 ‘폭력의 악령’마저 우리 앞에서 무릎 꿇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으로 단호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손해와 위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과 폭력의 ‘군대 마귀들’을 없애는 일에 수많은 ‘돼지떼’라는 재산을 잃습니다.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자기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할 지경입니다. 말이 간청이지, 떠나라는 위협이 분명합니다.

손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이 모든 ‘오염’에 관여하고 ‘폭력의 악령’과 대결하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을 되찾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우리 자신입니다. 정죄와 혐오, 희롱과 차별, 폭력과 죽음의 사회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맑고 투명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실천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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