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요한 3:1-17)
낯익고 편한 곳을 떠날 때, 믿음의 순례가 시작됩니다.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그 순례에 동행하는 힘을 확신할 때, 복이 다가옵니다. 받은 복을 움켜쥐지 않고 남에게 끼치고 나눌 때, 우리 삶에 덕이 섭니다. 이 과정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순례를 떠나 낯선 이들을 환대하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이 순례가 생명을 선물로 발견하는 은총의 길이라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두려움을 넘어 낯선 자유와 구원의 성령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득권과 지위를 내려놓아 얻은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저 ‘동네의 높은 아버지’(아브람)에서 ‘세상 전체를 품은 아버지’(아브라함)가 되었습니다. 그는 괴롭고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고 나서야, 오히려 헐벗고 지친 나그네를 품고 환대하며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잃어서 더 큰 복을 누리는 순례의 길이 신앙이라고 그의 삶은 증언합니다. 그는 과거의 세상 권력과 재산을 자기 대에 누리지 못했을망정, 후손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에게서 인간과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합니다. 신앙은 축복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려는 소망을 하느님께 부탁하여 그 대가를 지급하려는 행실이 아닙니다. 진노의 심판을 피하려는 주술행위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우리 삶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착한 행실은 그 감사의 응답 안에서 기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생명을 함부로 짓이기거나 훼손하는 처사에 용기 있게 저항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과 은총을 지키려는 노력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로 섭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니고데모에게 자유를 선사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들으려다 오히려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려는 수단으로 경전을 읽으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였던 종교 권력자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밤에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잡은 손을 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선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움켜쥐려는 경쟁과 성취는 우리 사회를 더 깊은 낭패와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 삶의 기준을 이 땅에만 두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가치, ‘위에서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향할 때 우리는 새로운 자유로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우리처럼 감추고 싶은 ‘어둠’이 있었을까요? 세상에서 실패하여 좌절했거나,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에 묶여 스스로 움츠러들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우리를 자유의 바람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존재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바람과 숨결과 성령은 어떤 낭패와 절망의 벽, 장애와 차별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그 성령이 이미 우리 몸 전체에 깃들어 있으니, 이를 발견하고 어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입니다. 경쟁과 권력의 어둠, 단죄와 수치의 어둠을 넘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높이어서 우리 삶과 생명을 회복하시려는 예수님과 함께 신앙인은 오늘도 부지런히 걷습니다.
March 14th, 2017 at 9:34 am
“하느님의 바람과 숨결과 성령은 어떤 낭패와 절망의 벽, 장애와 차별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그 성령이 이미 우리 몸 전체에 깃들어 있으니, 이를 발견하고 어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러하신 하느님이 육신을 입고오셔서 우리속에 계시며 즐거움과 기쁨과 고난을 함께 나누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더욱 생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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