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대주교 대림절 사목 서신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림절 사목 서신을 번역해서 올립니다. 내년 2월에 있을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를 앞두고 지금 논란 중에 있는 문제들에 대한 특별한 성찰과 기도를 요청하는 서신입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의 깨달음과 성찰의 제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대림절 사목 서신

1. 다시 한번 대림절기를 향해 가면서 나는 우리 세계 성공회의 안녕과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제자직의 미래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이 글을 씁니다. 디모테오 후서 4장 8절에서 사도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교회는 – 그 인간적인 면에서 –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일 – 겸허하게 인간으로 태어나신 일, 그분의 사목,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 을 통해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감사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지극한 사모의 희망으로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 본기도에 드러난 그 심오한 말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때에 두려움 없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앞을 바라 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성공회 전통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빈 이임즈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한 람베스 위원회의 윈저 보고서에 대해서 성찰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인 듯 이 과제는 대림절기와 성탄절기를 통해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통찰을 늘 염두해야 합니다. 이 점이 내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상입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창조하는 친교에 이끌려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 어떤 성취와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신앙을 확고하게 붙잡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자유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동체적인 삶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활동에 대한 표지이자, 그분이 지니신 사랑의 성사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 인간이 “신성하게” 될 수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신성함은 하느님과 그 피조물 사이의 어떤 혼란을 통한 것이 아니라, 창조 그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목적과 치유 행동을 드러내는 투명한 통로가 되고,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양자와 양녀가 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하느님의 목적과 행동에 대한 이러한 투명한 통로가 지극히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말씀의 창조’ 공간입니다. 즉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서에 쓰인 말씀으로, 설교와 성사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가운데 지금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시기에, 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듣게 하고 보여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한 교회는 우리의 실패가 극명하고도 고통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신앙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회개하는 모습과 제자됨을 향한 그 여정을 거듭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윈저 보고서가 가져다 주는 가장 깊은 도전 가운데 하나는 회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점에서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쇄신이 늘 다른 사람의 회개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계시며, 우리의 우선적인 의무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분명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윈저 보고서의 의견에 따라 많은 사과 표명이 있었던 탓에, 회개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중심점을 쉽게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사과는 세상의 유행입니다. 법정에 선 사람들은 만족할 만한 사과와 적절한 책임 표명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희망하고 기도하는 것은 이런 차원을 넘어서달라는 것입니다. 사과는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니 미안합니다.’ 그리고선 더 이상 깊이 나가지 않습니다.

서로를 앞에 두고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 증인되라는 사명에 실패했으며, 사랑을 통한 완전한 상호의존의 관계로 살아가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을 듣게 하시고 드러내실 수 있는 방법 안에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교회의 갈등에 대해 언급할 때, 성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라야 세상은 예수님을 우리를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윈저 보고서가 올바르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자치’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것은 모든 지역 교회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해여서는 안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의 모든 진영에는 대안의 여지가 적으니, 우리의 미래를 가는 대로 맡겨두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서로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더라도 그저 교회들이 서로 다른 길들로 가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 주신 은사는 단순한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는 전세계 성공회에 걸쳐 우리를 교회 대 교회로, 사람 대 사람으로 묶고 있는 수많은 비공식적인 연대를 자주 잊고 있습니다. 이런 연대의 방식은 우리의 공적이고 공식적인 연결들이 없이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러한 은사를 존중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포기해선 안될 가치입니다.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1고린 12:21)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 내 일부의 행동이 그에 대한 반대를 유발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했던 일들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듣게 하고 그분을 드러나게 하는 것일까?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성서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교회는 말씀의 창조 공간이 아닌 곳으로 비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다른 교회들이 감당하기에 무거운 짐들을 부과하고, 이로 인해 그들이 어떤 불명예의 고통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귀 기울이기 전에 그들을 무시해버리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이러한 물음들을 천천히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건강에 매우 중요한 물음들이지 결코 사과의 용어들과 말들을 두고 논쟁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물음들을 다룰 때라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그리스도께로 부름으로써 서로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을 우리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논쟁의 열기 속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포함한 동성애자들이 교회 안에는 자신들에게 좋은 소식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듣게 됩니다. 많은 나라들에서 동성애자들이 실제로 잔인하게 박해당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떤 법적인 제재가 없는 곳에서 조차 그들은 거부당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젊은 동성애자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처지에 깊이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믿으며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본성 때문에 정죄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최근에 런던에서 일어난 한 동성애자 살해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무지한 젊은 청년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 당했습니다.

1998년 람베스 결의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즉 세계 성공회는 – 교회가 성서를 읽는 바에 따라서 – 동성애의 행위가 축복받을 수 있노라고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의안은 또한 동성애자들을 향한 어떤 폭력적인 말이나 행동, 그리고 편견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죄가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전의 람베스 회의 결의안들 역시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를 공격하거나 욕하는데 사용될만한 어떤 말들도 회개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서의 도전을 이야기하는 최선의 방법이며, 어떻게 우리는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심지어는 증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4. 우리는 지금 우리 공동체의 미래상과 성격이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지점에 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몇 달 후로 앞두고 있는 여러 모임과 회의들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며, 특별히 관구장 회의를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윈저 보고서는 어떤 계약의 형태로 우리를 기꺼이 긴밀하게 묶어줄 어떤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안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강요할 수 없으며 그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이거나 독재적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일치를 설명하는 매우 창조적인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에큐메니칼 동반자들과 함께 이런 계약들을 만들어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자유롭고 정직하게 만들어낼 적절한 약속을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맡고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직의 미래에 대한 제안도 논의될 것입니다. 이 제안은 어떤 중앙집권적 권한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계약적인 관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분별하며, 이것이 위협당할 때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호 독립과 더불어 서로에 대한 책임 사이의 쉽지 않은 균형을 추구하며 분별하는 것을 요구하며,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할 위험에 직면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마르 9:42, 로마 14장). 한 몸인 교회가 성찰과 결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 양심에 진실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궁극적으로 함께 모이게 할 유일한 것은 우리가 서로 안에서 같은 주님을 같이 사랑하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공적인 성명이나 발표가 우선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나눌 수 있을 때라야 신앙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몇 달 후에도 이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세계 도처에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디서든지 기도 안에서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 선한 목적을 위해서 세계성공회의 다양한 연결 통로를 이용합시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우리가 나누었던 좋은 것들을 잊지 마십시오. 회개는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가 나누고 있는 잘못들과, 죄스러우면서도 분투하는 제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생각해 주십시오.

5. 우리는 윈저 보고서를 통해서 가치 있고 도전을 던져주는 훌륭한 작업 도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우리의 모든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바르고 유용한 물음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이 대림절기에 나는 여러분들이 대림 제 2 주간에 특별한 시간과 관심을 내어주기를 부탁합니다. 성서라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전통적인 주일 이후에 계속되는 주간 동안 이 모든 일들을 두고 기도하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함께 우리 하느님과 구세주를 드높이고, 이 세상 속에서 그분의 선교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도록 합시다.

“우리가 소망하는 복된 날을 기다릴 때에,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디도 2:11). 주님의 오심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시기를 빕니다.

+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주낙현 신부 역, 2004년 12월 1일)

One Response to “캔터베리대주교 대림절 사목 서신”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동성애와 성공회의 일치 Says:

    […]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후 이와 관련된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대림절 사목 서신을 성공회 신문에 소개했다. 다행히 [윈저 보고서]는 우리 말로 번역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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