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유감, 그리고 “성공회 현대 영성”

번역이 힘들다는 건 그 일을 해 본 사람이면 더욱 잘 안다. 그래서 좋은 책의 좋은 우리말 번역을 대할 때면 옮긴이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곤 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번역, 아니 이보다는 전혀 우리 말이 아닌 번역에다가 오역까지 겹쳐 있으면 언짢은 마음이 오래간다.

성공회에 관련된 내용은 여러 신학 번역서들에서 오역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성공회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이 크리라. 하지만 번역자는 최소한 용어 확인 쯤은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전혀 읽어내려 가기 어려운 번역이다. 이미 오랫동안 영어권에서 영성 신학 공부의 입문 교재로 널리 쓰이던 “The Study of Spirituality”의 번역서 “기독교 영성학”(은성)은 낱장을 넘기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날 밤으로 성공회 관련 내용을 다시 번역하고, 그 책을 아예 치워버렸다. 옛 자료를 정리하다 다시 발견한 3년 전 어느 날 밤의 번역을 여기서 나누려 한다.


A.M. Allchin, “Anglicanism,” Cheslyn Jones et.al. ed., The Study of Spirituality (Oxford:Ocford University Press, 1986), pp.537-540

현대 영성 – 성공회

A.M.Allchin

20세기를 아우르는 성공회 영성의 특징을 어느 한가지로 잡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시기에 성공회 영성 전통은 여러 전통들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소화하여 융합시키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처럼 다른 전통에 대한 개방성이야 말로 이 시기 성공회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는 대체로 신학과 영성을 분리하기를 꺼려했다. 최근에는 더욱이 인간의 내적 삶을 삶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현실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저항해왔다. 그것은 영성의 분야를 그리스도교적 성찰의 다른 여러 형태로부터 분명하게 구별하여 경계 긋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대주교는 금세기 가장 많이 읽힌 영성 서적 가운데 하나인 [요한복음 독서] Readings in St. John’s Gospel 를 학문적인 격식이 없는 형태로 저술했던 것이며, C.S.루이스(Lewis)는 여러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선언을 기도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명령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80년간의 발전은 분명한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 있는 고전 저작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선구적인 저작인 [신비주의] Mysticism 가 갖는 중요성은 결정적이다. 최근에 이러한 경향은 14세기 영국 신비가들, 특히 노리치의 줄리안과 [미지의 구름]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와 앤드류 라우스(Andrew Louth)와 같은 이들의 저작들을 통하여 큰 힘을 얻고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한 이들의 학문적인 저작들은 학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고 신앙적인 관심을 갖는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또한 수도회 전통의 영성이 영향을 키워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예로 매리 클레어 수녀(Mother Mary Clare)의 [심오함과의 대면] Encountering the Depths, 그리고 에스더 드 왈(Esther De Waal)이 베네딕트 규율을 평신도의 입장에서 주석한 [하느님을 찾아서] Seeking God 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근거인 성서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이미 캔터베리 대주교 가운데 한분의 작품을 앞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뒤를 이었던 대주교 두 분의 작품도 매우 중요하다.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의 저작은 늘 성서 신학과 영성 사이에 걸쳐 있으며(예를 들어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변화] The Glory of God and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 도날드 코간(Donald Coggan) 대주교는 [신약성서의 기도들] The Prayers of the New Testament 을 통하여 정통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관심을 얻는 성서 해석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성공회 안에서 영성 생활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끼치며 발전된 것은 성찬례와 그 실천을 쇄신하고 심화하는 것이었다. 에블린 언더힐의 두 번째 주요 저작인 [예배] Worship 가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적 영성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두 사람의 저작은 바로 가브리엘 히버트 신부(Father Gabriel Hebert)의 [전례와 사회] Liturgy and Society 와 [교회의 성찬례] Parish Communion, 그리고 그레고리 딕스(Dom Gregory Dix)의 [전례의 형태] The Shape of Liturgy 이다. 최근의 성공회 작품들은 대체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을 철저히 성사적인 것으로 보고 성찬례를 중심으로 하는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 전통 간의 교류가 진전되는 가운데, 성공회도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 예를 들면 이슬람에 대한 케네스 크래그(Kenneth Cragg)의 저작이 있고([사원 첨탑의 부름] The Call of the Minaret, 존 테일러(John Taylor)가 아프리카 종교를 연구한 뛰어난 저작 [시원적 비전] The Primal Vision 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역은 대체로 성공회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나 비드 그리피스(Bede Griffiths), 그리고 윌리암 존스턴(William Johnston)과 같은 천주교 저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시(詩) 분야에서 성공회의 20세기는 놀라우리만치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T.S.엘리어트의 시구들(특별히 [사중주] Four Quartets 의 내용들)이나,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날카로움이 빛나는 R.S.토마스(Thomas)의 시구들은 많은 영성 서적에 인용되었으며, 이는 시에 별로 친근하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기도와 묵상을 제공해주었다. 뜻밖에도 문학과 영성 사이에 새로운 개척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찰스 윌리암스(Charles Williams)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성공회 영성 저작들의 문학적 품격은 특별히 지난 20년 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1960년대에 성공회 영성은 상당한 위기를 통과하게 된다. 그 전 50년 동안에 나왔던 저작들은 지나치게 교회적인 특징을 보이거나 지나치게 경건주의적인 인상을 주었다. 기도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한가?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 우리 삶의 내적인 삶과 외적인 현실의 관계를 더욱 깊이 연관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매우 뛰어난 저술가들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 앨런 에클스턴(Alan Ecclestone), W.H.반스턴(Vanston), 그리고 H.A.윌리암스가 돋보인다. 감리교도로서 지극히 성공회적이었던 네빌 워드(Neville Ward)와 함께 이들은 우리 시대에 좀더 적합한 영성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뜻밖에도 영성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한결같이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였지만, 땅 밑을 숨어 흐르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영성 분야에서만은 지속되었다. 20세기는 점차 협력과 화해의 시기가 되었으며, 서로의 전통을 무시한 채 각자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회는 시토회 수도자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과 루터교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의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여기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다. 미래에도 각자의 전통은 나름대로 그 나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전통들은 좀 더 가깝게 그리고 자유롭게 협력하고 친교할 때라야 자신의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2 Responses to “번역 유감, 그리고 “성공회 현대 영성””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Says:

    […] 20세기 신비주의 영성 연구의 대가이 현대 성공회 영성의 이정표인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의 70주기가 되는 해이자, […]

  2.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성공회 역사와 전통은 왜 교회의 미래에 중요한가? Says:

    […] 영성신학자 알친(A.M. Allchin)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회 신자는 지금 깨닫지 못하는 전통의 […]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