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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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세기 신비주의 영성 연구의 대가요, 현대 성공회 영성의 이정표인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의 70주기가 되는 해이자, 그의 책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이자, 현재는 미국 성공회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 쇼 신부가 영국 처치 타임스 지에 언더힐에 대한 짧은 글을 실었다. 짧은 글에 언더힐의 핵심적 면모를 뽑아 명료하게 정리했다. 그 글을 번역하여 아래에 싣는다.

옮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사실과 이글에서 눈여겨봤으면 하는 부분을 되새기려 한다. 언더힐은 그 당시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강연했던 ‘여성 평신도’였다. 그의 책 <<신비주의>>는 출간 후 3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다. 천주교에 관심을 뒀지만, 성공회를 몸담을 교회로 선택했고, 신학과 신앙에서 “성공회-가톨릭주의자”로 자처했다. 옮긴 글에서 지적했듯이, 초기 개인주의적 영성에서 공동체적인 영성과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고, 이로써 교회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겪었다. 또, 영성과 전례의 삶을 일상의 생활로 이으려 노력했다. 이런 각성의 변화 추이는 오늘 우리 교회에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성공회 전통과 그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언더힐의 궤적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제인 쇼

올해는 이블린 언더힐의 <<신비주의>>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6월 15일은 그의 별세 70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재판을 거듭했다. 언더힐은 이 책에서 영성과 기도를 다룬 위대한 저자들의 작품을 검토한 뒤, 신비주의는 “살아 있는 절대자와 누리는 의식적인 연합”의 길이라고 했다. 이 책은 위대한 성과였다. 폭넓고 깊은 독서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영적 여정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더힐이 정리한 신비주의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언더힐은 머리만큼이나 가슴을 강조했다. 그것은 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열정’이다. 둘째, 그는 신비주의를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자신의 이웃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셋째, 그는 신비주의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이 신비주의의 길을 붙잡고 걸을 수 있다.

1914년, 언더힐은 길이가 훨씬 짧은 책을 냈다. <<실천적 신비주의: 보통사람을 위한 작은 안내서>>이다. 여기서 그는 신비주의란 과거의 도통한 비결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이나 경영을 배우듯이 신비주의도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독자는 ‘학습 과정 속에서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연습 과정에는 내적 고요와 감각의 정화를 위한 다섯 단계가 있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거룩한 존재와 만남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언더힐이 정의한 신비주의의 길은 매우 개인적인 노력으로 한정됐다. 당시 그는 이 연습 내용에 교회 생활을 넣지 않았다. 의아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언더힐은 신실한 성공회 신자로서 영적 지도자요, 탁월한 피정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쓸 때, 그는 어떤 교회에도 몸담지 않았었다.

언더힐의 영적 깨달음은 서른 살 때인 1904-05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후로도 17년 동안 어느 교회도 공식적으로 몸담지 않았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그는 천주교 전통에 눈을 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언더힐의 남편이 주저했고, 당시 모더니즘의 폭풍이 일면서 자신도 머뭇거렸다. 영국의 조오지 티렐을 비롯한 천주교의 여러 성직자가 비판적 성서 연구와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했던 것이다. 1911년 언더힐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여러 면에서 나는 ‘모더니스트’야. 천주교인이 된다면 여러 압력이 있을 테고, 그로부터 도피하거나 변명하며 살아야 할 거야. 그런 곳에 나 자신을 맡길 수는 없어.” 그는 미사에 참여했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신비주의>>를 출간한 지 10년이 지난 1921년, 언더힐은 마침내 성공회 신자가 됐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점차로 공동체적인 영성에 투신하게 되었다.

언더힐이 쓴 마지막 대작은 1936년의 <<예배>>이다. 여기서 그는 영적 발전에서 성사와 공동체적 의례가 지닌 힘을 강조했다. 그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인정했다. “나는 교회 문제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었다. 오랫동안 교회를 반대하는 편에 섰다. 내 큰 잘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란다.”

언더힐은 길을 찾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어느 교회에도 몸담지 않던 시절, 자신의 영적 지도를 받던 이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더힐은 자신이 고민하고, 식별하며, 배우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탐구 과정을 다른 이들과 완전히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을 계속했다. 그는 쉽사리 “오직 하느님께로만” 치우치는 자신의 기질을 인정했다. 그래서 바론 폰 휘겔(언더힐의 영적 지도자)을 통해서 신앙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육신적 차원을 배웠다.

언더힐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실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또 정당한 전쟁론을 찬성했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1930년대에 들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언더힐은 탁월한 서신 교환자였다. 그의 편지에는 영적인 지혜와 더불어 상식적 감각과 재치로 넘쳤다. 수덕주의에 기울던 어떤 이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 자신의 사순절을 생각해 봅시다.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육체적인 고생을 사서 하지는 마세요… 잠을 줄이려고 하지 마세요. 추운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친절하도록 하세요.”

언더힐은 자라나던 피정 운동의 지도자로서 성공회에 또 다른 공헌을 했다. 그가 적은 대로, 1913년에 영국 성공회에는 피정집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는 교구 소속으로 22개의 피정집이, 수도회 소속으로 30개 피정집이 운영되고 있었다. 언더힐은 이 운동의 성장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피정집은 에식스의 플레시 피정집이었다.

그의 글은 재치가 넘쳤다. 성직자 부인 100여 명을 피정 인도한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아무도 성당에서 미사가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미사를 시작하는 종이 울렸을 때 나는 욕실에 있었다. 머리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성당에 다다랐을 때는 복음 독서가 끝난 뒤였다. 그날은 침묵 기간이었는데도 누구도 지키지 않았다… 뭐, 그래서 열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그 곰팡내 나는 교회에서 같이 머물렀지. 그리고 점심으로는 햄 샌드위치를 먹었다. 금요일이었지만.”

실천적이고 신비적이었으며, 열심히 탐구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블린 언더힐. 그는 영적 여정에 있는 모든 구도자들과 신실한 성공회 신자들에게 멘토로 남아 있다.

원문: Jane Shaw, http://goo.gl/3J4h3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유상신 신부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역주: 글쓴이에 대해서 몇 자 적는다. 1965년생인 제인 쇼 신부(The Very Rev. Dr. Jane Shaw)는 영국 성공회 소속 사제요, 역사신학자이다. 현재는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의 주임 사제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직 과정과 신학 공부를 하고, 미국 UC 버클리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29세 나이에 Ph.D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중세 교회사 안에서 잊힌 여성 역사의 재건.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뉴칼리지 신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지금까지 영국 성공회 주교원 신학 자문위원이다. 2010년 11월부터 미국 성공회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 주임 사제로 일하고 있다.

6 Responses to “이블린 언더힐 – 일상의 신비주의를 위하여”

  1. Elyot Says: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 분 책이 한국어로도 한 두 권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관심이 생깁니다.

    뉴먼 추기경도, 천주교로의 전향? 개종? 이 그의 이탈리아 여행에 뒤따랐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언더힐 여사도 그랬었군요. 확실히, 영국인에게, 천주교란 그러한 이탈리아 체험, 남국 취향, 그랜드 투어, 예술 애호같은 것들과 떼어놓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일까요?

    사실은, 영국인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제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건축이든, 또 문학이든, 예술품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생활에 많은 영감과 기쁨을 전해 주므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함께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때로는 제가 종교를 믿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예술 감상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혼동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혹시, 위대한 작품들의 혼을 깊이 흡입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실은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내가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점검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제게, 예술은 종교를 돕기는 커녕 그것의 최대 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제 자신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도, 성상파괴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이, 십분 이해가 가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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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Elyot / 아,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찌 지내셨나요?

    언더힐의 작은 책 두 권이 나온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절판이어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말씀이 질문인지 의견인지 잘 분간이 안 됩니다만, 😉 제 마음대로 토를 달자면 이렇습니다.

    1. ‘영국인과 천주교’에 대한 연결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19세기 영국은 여러 전통이 그 가치를 여러 모양으로 드러내고 실험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국교인 탓에 어떤 점에서 메말랐던 ‘영국 성공회’에서, 여러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다양한 모색과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신앙적 해방의 출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억압되었다가 점차로 풀려난 천주교 전통에 대한 경험은 그런 신앙적 추구와 맞물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성공회-가톨릭주의”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뉴먼은 천주교로 건너가서 꼭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언더힐은, 이미 글에서 지적된 대로, 천주교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2. 어떤 이는 예술인은 그 자유로운 영혼 때문에 ‘교리적’인 종교인이 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만, 그것은 ‘교리적 종교’의 편견 탓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역사에서 예술은 그런 ‘교리적 종교’의 지평을 넓혀주면서 종교의 생존을 도왔다는 생각입니다. Elyot 님의 사적인 경험은 알 수 없습니다만, 대립적으로 볼 일은 아닙니다.

    3. 신앙적인 면에서 ‘청교도와 성상파괴주의자들’의 행동은 썩 존경받을 만한 것이 아니고, 옳았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결국 억압적으로 변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예술적 창조자이시고, 세상이 하느님의 작품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적 감각을 만끽하시며 예술가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에 성큼 발을 내 딛으셨으면 합니다. 😉

    [Reply]

  2. Elyot Says:

    감사합니다.

    (1) E. 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 을, 처음에 영화로, 이후에는 소설로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언더힐 여사와 같은 시대였겠군요. 에드워드 시대에, 영국인에게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와 로마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었는지; 단순히 외국의 훌륭한 경관을 접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을 향후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좌우할만한 커다란 전환의 계기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언더힐 여사는 물론 성공회를 택하였습니다만, 그녀의 천주교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이탈리아 여행 다음에 온 일이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뉴먼 추기경도, 조금 더 전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이탈리아에 다녀와서 천주교로 개종했지요. 실제로, 영국인들은, 이탈리아에 갔을 때 자신의 가능성을 최고로 실현하고, 거기서 최고의 사랑을 할 수 있고, 최고의 작품 (예술, 학문 등) 을 남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신앙 (?)” 이 영국만의 것이 아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한 면이 있어서, 프랑스와 미국이 각각 로마에 자국 예술가들을 체류시키고 후원해주는 “아카데미” 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더군요.

    일테면, 영국인에게 천주교란 이러한 이탈리아 체험의 여파 때문에 절실해지는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일종의 “영국 안의 로마” 로서 추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 신앙을 가지면서, 로마라는 일종의 “근원적 체험” 을 계속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한국에서, 제 주변의 아주 가까운 한 분은, 이탈리아에 다녀 온 후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본인 스스로 그러한 연관을 많이 의식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 미켈란젤로와 같은 종교를 갖는 것, 모짜르트, 핸델, 바흐와 같은 종교를 갖는 일이, 그들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헤겔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이해가 잘 되는 철학자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혜택들이 어느 틈엔가, 그리스도교를 “교양” 의 일부처럼 만들어 버리는 측면이 제게 감지된다는 점입니다. 제게는 이런 것이 기독교적인 “양심” 에 대단히 저촉되는 부분, 일종의 고백하고 참회해야 할 부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한참 늘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종교와 더없이 행복한 관계에 있었으나, 이제는 더없이 번뇌를 일이키는 요인들이 되어서, 종교와 자신들 사이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핸델의 메시아가 좋아서 기독교인인 거야. 할렐루야 코러스에서 최대의 엑스터시를 느끼고 싶기 때문에, 계속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으려 하는 거겠지.” 같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물론 핸델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3) (http://www.guardian.co.uk/books/2011/apr/17/book-of-books-melvyn-bragg-review)
    신앙 생활과 관련하여 참고할 예로서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의 방송인이지 저술가인 멜빈 브랙 경은, 21세기에도 교회를 가는 사람들의 “gallantry” 를 자신은 존중한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합니다. 금년 킹제임스 성서의 400주년과 때맞추어 나온 그의 책에 나오는 말로서, 위의 서평 글 말미에서 찾아 보입니다. 저 또한, 제 자신 신앙 생활에서 추구하는 바가 실로 “gallantry” 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혐의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gallantry” 가 뭐 어때서 그러느냐, 그것을 쓸데없이 두려워 하고 있는 이 시대 특유의 질병에 걸려 있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동료 사람들의 기분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도 꼭 좋은 일은 아닐 듯 합니다. 자신을 반시대적인 영웅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저 동키호테같은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Reply]

    fr. joo Reply:

    Elyot / 흥미로운 댓글 감사합니다. 다시 주신 댓글에 대한 제 생각은 제 첫 답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 몇 마디 덧붙입니다.

    1) ‘영국의 이탈리아 동경’이라는 가정(을 현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을 뉴먼의 개종과 언더힐의 경향으로 연결하는 데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습니다. 뉴먼의 이탈리아 여행은 천주교에 대한 깊은 실망과 비판적인 시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소위) ‘개종’은 그의 신학적 탐구와 그 방향에서 나왔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언더힐도 이른바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천주교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사실 신비주의는 천주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억압받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교를 교양의 일부처럼 만들어 버리는 측면”에 대한 성찰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어떤 신앙적인 도약을 위한 고민의 단계에 있는 듯합니다. 신앙은 그전의 여러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 도약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이 단계에서 그 ‘교양적 경험’과 신앙을 대립시키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위험한 길일 수 있습니다.

    3) 재밌는 글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gallantry”라는 말을 쓴 맥락이 명확하지 않고, Elyot 님의 의도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과감한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세상 속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 용기가 과거의 유물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인지,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비추는 근본적 변화에 대한 투신인지에 따라 그 방향과 실천의 내용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흥미롭고 깊은 대화로 이끌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Reply]

  3. Elyot Says:

    그렇군요. 제가 완전히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번잡한 질문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귀한 가르침 되새기며, 더 반성하고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Reply]

    fr. joo Reply:

    Elyot / 어떤 질문도 그것이 질문인 한 “어리석고 번잡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거 없는 고집과 주장의 강요가 ‘어리석고 번잡한’ 일이죠.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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