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마리아, 예수, 머튼, 본회퍼

“두려워 하지 마라.”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전하며 그렇게 말을 뗐다. 마리아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태어난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첫 아침에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마라.”

이 전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핵심 사건인 성육신과 부활에 자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일에서 시작되어 완성되고, 다시 시작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다시 그의 자궁에 품은 예수에게서 다시 제자에게로 돌아가는 일은, 제자된 우리가 이제 우리의 몸 속에 예수를 담는 마리아인 것을 상기시킨다. 제자된 우리는 현재를 사는 마리아이다.

가끔씩 잊고 살거나, 아니 이를 아예 잊고 싶어할 때, 신앙의 위인들은 자신이 겪은 두려움 속에서 이 전언을 다시 새겨듣고는, 우리에게 합장하며 그 겸손한 죽비를 내려치곤 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맞는 이 시간에 두 분의 글을 떠올려 옮겨 놓는다. 토마스 머튼의 기도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시이다. 어깨 시큰하도록 맞고 싶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기도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 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제 자신을 알 수 없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제가 그리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갈망이 실제로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걸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그 갈망을 갖길 희망합니다. 그 갈망에서 벗어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스스로 희망합니다. 그리할 때, 제 비록 아무 것도 알지 못해도, 주님께서 옳은 길로 이끄실 것을 압니다.

그러니 죽음의 어둠 속에서 갈 곳을 잃어 헤맬 지라도 주님을 항상 신뢰하렵니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험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테니까요.

in Thoughts in Solitude

본회퍼(Dietrich Bonheoffer, 1906-1945)의 기도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게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갇힌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침착하고 활기있고 단호하다고 한다.
자기 집을 나서는 주인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주 말하기를
내가 간수들에게 말할 때
자유롭고, 친절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한 말하기를
내가 불운의 날들을 견디어 내면서도
한결같이 웃음을 짓고, 당당하다고 한다.
늘 승리하는 사람처럼.

글쎄,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쉬지 않고 갈망하며 병든,
누군가의 손이 내 목을 조르는 듯이 숨 가빠하는,
다채로운 색깔과 꽃과 새 소리를 그리워하는,
친절한 말들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목말라 하는,
큰 사건에 대한 기대로 몸부림치는,
멀리 떨어진 친구들에 대한 염려로 힘없이 마음 졸이는,
기도와 생각과 일마저도 지치고 공허해진,
약해져서 그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할 준비가 된,
(그런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

(1944년 옥중 어느날 – 1946년 3월 4일 발표)

* 역주: 원 독일어의 영역에서 중역

14 Responses to “두려워 말라… 마리아, 예수, 머튼, 본회퍼”

  1. 짠이아빠 Says:

    주신부님과 가족 모두에게 올해도 주님의 은총 가득하시길 ^^

    [Reply]

  2. 지우 Says:

    주낙현 신부님
    맘과 몸이 지쳐서 방황할때면 이 블로그를 찾곤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위로를 얻고, 쉬어가는 이 블로그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던지 항상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Reply]

  3. 상신 Says:

    어깨가 시큰하도록 맞고 싶다는 주신부님의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때때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시는 은총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래도 그 몸서리 쳐지는 두려움에 주님께서 나지막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본회퍼의 기도를 다시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ply]

  4. fr. joo Says:

    짠이아빠 / 짠이아빠에게도요. 늘 감사…

    지우 / 반갑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새해에 소망하시는 일들에 큰 진전이 있길 바랍니다. 지우님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잠시 들러 봤습니다. 깊이 고민하시고 열공하시는 분이군요. ^^… 그리고 이 댓글을 참조하실 수 있을는지요 ^^; 자주 뵙길 바랍니다.

    상신 / 본회퍼의 시를 번역해 올리는데, 예전에 교도소 밖 내무반 옆 배추밭 비탈에서 함께 이야기 나눴던 유신부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Reply]

  5. 지우 Says:

    댓글을 읽고 쿵! 하고 놀랬습니다. 오늘 제 블로그를 다시 돌아보니 출처 표시하지 않고 신부님 블로그에서 퍼간 글들이 몇개 더 있네요. 혹시나 맘 상하셨으면 죄송하구요. 주신부님 글들을 좋아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으로 여겨주시고 너그러이 생각해주세요.^^; 이제부터는 출처를 꼭꼭 달아놓도록 하겠습니다.

    [Reply]

  6. fr. joo Says:

    지우 / 맘 상할 일 전혀 없습니다. 다른 댓글에도 적은 것처럼, 출처 표기가 문제가 아니라, 지우님의 생각이 확장된 걸 읽어보고 싶은 독자의 마음일 뿐입니다.

    [Reply]

  7. 지우 Says:

    비슷한 의미의 글이 있어서 갖다 붙여놓겠습니다. 부족한 글이라도 시간 나실때 읽어주세요. 신부님~^^.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샬롬.

    [Reply]

  8. 정요한 Says:

    주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랜만에 들어와서,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오랜만에 다시 보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앞으로 가는 길에 대해 고민 많은 저에게, 머튼의 기도와 본회퍼의 시가 나름 답이라면 답이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언제고 또 전화로 말씀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

  9. fr. joo Says:

    정요한 / 카드로 보내 준 새해 인사 잘 받았어요. “우주” 얼굴이 우주같았습니다. 서로 귀 기울여 주는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가정에 사랑과 행복을 빕니다.

    [Reply]

  10. seoulrain's me2DAY Says:

    서울비의 알림…

    두려워 말라…… 마리아,예수,머튼,본회퍼…

  11. 리브가 Says:

    친구들과 지인들과 나누고 싶어 퍼갑니다.

    기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Reply]

  12.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토마스 머튼 – 재의 수요일 Says:

    […] 몰아내야 할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의 문을 좁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가 사랑할 […]

  13.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본회퍼 –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Says:

    […] 그가 가장 자주 글을 쓰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44년 7월에 쓴 유명한 시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

  14.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나는 누구인가? – 본회퍼 축일 Says:

    […]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나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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