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잔인한 달” – 우리의 황무지

늘 스산한 소식만 전해오는 소식에 귀 닫고 살고 싶었다. 신문도 안 열어보고, 트위터도 안 켜고, 그저 침잠하며 살고 싶었다. 누구의 처신대로 “누구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고, 속마음을 절대로, 끝까지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된 사회와 조직 속에서, 이미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리 지쳐버린 것 같았다.

“제 성직의 소명이 하느님께서 제게 품은 희망과 닿을 수 있도록 식별하고 실천하려 한다. 그런데 여러 처지 속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일삼아 그 식별과 실천을 보류하다가, 우리가 은퇴한 뒤에야 회한의 소리로 그런 목소리를 낸다면 매우 무참한 일이 될 것”이라 항변하면서도, 그렇게 지쳐버린 마음을 따라가고 싶었다.

닫은 귀를 비집고 들려오는 소음들. 그 소음에 깨어 가끔 열어보는 이야기들에는 끔찍한 야만의 기록들이 선연하다. 관음증일까? 남이 남기고 간 편지를 들춰 읽는 일. 2년 전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한 연예인의 편지를 읽는 일. 친필인지 확인되지 않았다고들 하는 그 편지를 읽는 일. 그러나 그 관음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는 내려읽을 수 없었다.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

이 대목에서 나는 치가 떨렸다. 가슴이 막혀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생각을 더 뻗어볼 수 있을까?

숨 막히지 않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말을 위해서 이렇게 쓴다. 그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T. S. 엘리엇을 되새겨 주었노라면서, 관음증에 이어 먹물인 것을 젠체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겪은 “잔인한 달”이 지난 세기 대 시인의 목소리보다 더욱 선명하도록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로 ‘열두 달’ 내내 이어졌음을 되새기려는 것일 뿐이다. 대 시인의 역설적인 절망과 희망이 오늘에 겹치 내 마음을 후벼 파지 않는다면, 그런 시 읽기는 뽐내는 일일 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T. S. 엘리엇 <<황무지>> – <죽은 자의 매장> 부분

계절은 얄밉도록 황무지에도 생명을 가져온다. 망각 속에서 가녀리며 질긴 목숨을 구차하게 살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을. 망각 속에서 힘센 놈들이 휘두르는 힘과 착취에 굴복하여, 그들이 던져주는 것들로 따뜻하게 살면 될 것을. 왜 우리의 기억과 욕망을 후벼 파는 것이냐, 이 계절은, 이 편지는.

시인의 계절은 눈으로 감춘 망각을 휘젓는 생명에 대한 자각이라도 되련만, 우리 현실의 그는 싸늘한 눈물과 죽음을 남겨서, 오랜 시의 주인공이 되었으되, 힘 없이 가련하기만 하다. 그의 죽음과 편지는 정말로 우리의 ‘무딘 뿌리’를 휘젖는 봄비가 될 것인가? 이제 그에게는 그 잔인한 세월이 그만 멈추고, 봄비로 휘젓힌 우리 욕망과 기억으로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남긴 한마디를 이제 한국이라는 황무지의 첫 구절로 삼자.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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