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걱정, 진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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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걱정, 진짜 신앙 (마태 6:22-34)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꽤 널리 알려진 이 티베트 속담에는 지혜와 핀잔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삶이 복잡하다 보니, 하느님께 모든 일을 맡기겠노라 다짐하는 신앙인의 삶도 염려와 걱정이 없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는 신앙인을 핀잔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를 밝히시고 우리 마음을 격려하시고, 마음의 방향을 바꾸라고 초대하십니다.

‘선택하십시오. 하느님입니까, 재물입니까?’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돈과 재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분명히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삶에 필요한 재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먼저 섬기는 일은 우리를 자유와 은총으로 이끌지만, 재물에 먼저 눈을 팔면 걱정과 불안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재물과 안정에 안달하다 생긴 불안과 걱정을 덜어달라고 하느님을 부르면 신앙이 아니라 염치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부추기는 재물의 성공과 지위의 성취는 우리를 자주 환상으로 이끕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우리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가 경고하는 ‘자기기만’입니다(1고린 3:18). 이 환상이 현실이 되어서 잠시 기쁨이 넘치기도 하지만, 금세 또 다른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마음과는 달리 타인의 성취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으로 다가오고,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얻은 사람은 그 성취감에 휘둘려 타인을 업신여기는가 하면, 얻지 못한 사람은 낭패감에 휩싸여 자신을 낮추어 봅니다. 재물이 가져다준 환상과 기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 그 자체를 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우리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손수 빚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수고와 숨결이 깃든 우리 존재가 저 잘난 환상과 저 못난 패배감에 둘러싸인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려 자기만의 ‘성’을 쌓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이 아니라, 자신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이 감옥에서 가진 것을 잃을까 염려하고, 더 상처받을까 걱정하고만 삽니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십니다. “감옥에서 어서 나오너라”(이사 49:9). 웅크리고서는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기만과 연민의 자기 중심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 막습니다. ‘가짜 걱정’에 휩싸여 자신의 위로와 안위를 먼저 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련히 하시겠느냐는 위로입니다. 그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구하라”는 명령에 따라는 사는 일이 ‘진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여러 질곡에서도 사랑으로 보살피시니, 우리는 세상을 자유와 정의와 평등으로 보살피는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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