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이콘 사이에서 –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3
이미지와 이콘에 대한 생각과, 우리 교회의 허명(虛名)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든다.
1.
한동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가? 2mb도 어떤 성공 신화와 삽질하는 이미지때문에 당선됐나 하는 생각이지만,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 삽질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만큼 자기 편한대로 조작가능한게 이미지다. 이게 앞에 언급한 천주교에도, 우리 성공회에도 해당이 되지 않나? 문제는 이미지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요즘 이미지는 위선과 동의어로 들린다.
2.
이미지와 말뜻이 같은 다른 말로 “이콘”(icon)이 있다. 특히 정교회 전통의 신학적 영성적 그림을 말하는데 쓰일 때다. 이때 이콘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성사(sacrament)와 그 정의가 가깝다. 감춰져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의 신비는 감춰져 있는데, 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이미지)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를 감상하려면 색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먼저 기이하고 불편한 상을 깊이 응시하여, 그것이 내게 말걸고 도전하는 것을 음미하는 일이다.
진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이콘이 우리 지각을 불편하게 할 것은 당연한다. 반면에 “이미지 정치”는 우리를 낭만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어떤 환상을 비춘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감추인 것은 무엇인가?
5.
남들 탓하자고 일련의 글을 올린 게 아니다.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질문은 대뜸 이렇다. “그럼 우리 (혹은 ‘느네’) 성공회는?”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들 한다. 가난하고 청렴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고,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의 삶을 생각하면 속 상해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그러나 더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작으니, 청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속에 여전히 “중산층 욕망”이 가득한데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에서 비판의 우위에 선 것뿐은 아닐까 하고. 그게 혹 허상은 아닐까? 허명은 아닐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성명서라도 내고 있는데, 그나마 그 입에 발린 말도 성공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우리 성공회의 정의평화사제단(예전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이었다)은 어디에 이름을 팔아 먹었는지, 그 안에서 애쓰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모르겠다. 천주교 주교회의의 성명서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신학적 반성의 언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어떤 신앙적 실천의 면모가 성공회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걸핏하면 87년도 6.10 항쟁의 구심에 성공회가 있었네 하고 짐짓 추억한다. [유월민주항쟁 진원지]라는 돌덩이 하나 구석에 박아두고 ‘왕년에 이랬네’하는 것인가? 왕년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왕년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없다. 그 왕년을 이야기한다 쳐도, 전체로서 교회가, 우리 성공회가 유월 민주화 항쟁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가? 아니, 그때 열심히 참여했던 이들을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 허명을 팔지는 말 일이다. 그 허명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치욕과 굴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울 수 있다. 불편함을 대면할 때라야, 그저 보이는 것 너머로 감춰진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February 24th, 2009 at 12:13 pm
글2.보다 자못 격한, 그래서 더 솔직한 언어로 마음을 드러내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저이지만, 종교인들의 삶과 일상, 그런 세속 한 가운데서 그네들이 갈등하면서도 지향하는 바, 궁극적으로 향하고자 바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단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 없는 저이지만, 이런 격정의 언어를, 이런 성찰의 언어를 ‘어떤 성공회 사제의 마음 가득한 육성’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선 무척 고맙고, 또 반가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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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4th, 2009 at 5:57 pm
민노씨 / 더욱 “격한 글”을 써서 금방 올렸는데, 올리는 순간 본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헉… 되살려 낼 수가 없고, 다시 쓸 맘이 쑥 들어가는군요. 🙁 격정이 앞서서 여느 때처럼 다른 곳에 적어 놓지 않고 직접 써서 올리다가 그랬습니다. 흠…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다 싶습니다.
민노씨가 언제나 댓글을 달아 좀더 명징한 표현으로 정리해 주시니 제가 큰 도움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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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4th, 2009 at 7:41 pm
그래도 왕년(전통)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왕년을 이야기 하면서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는 기회가 되지않을까요?
신부님 사순절이 시작되었군요.
재를 얹으며 참회하는 예배…
제가 전심으로 그렇게 하늘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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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4th, 2009 at 10:07 pm
카라치 김 / 예, ‘왕년’이 ‘전통’과 같은 말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서로 다른 말이잖아요. 왕년이 현재와는 상관없이 옛 일에 기대어 지금을 정당화려는 것이라면, 전통은 오히려 현재의 맥락에서 살아 숨쉬며 도전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된 사순절 맞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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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7th, 2009 at 1:39 am
제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생각들을 줄줄이 꿰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기도에 의지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로 남아 있었는데, 과연 신부님께서는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듯한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
요사이 더더욱 주님께서 가신 길과 제가 서 있는 길이 같아지도록, 같을 수 없는 경지라면 그 모서리라도 붙들려고 부지런히 애쓰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감사합니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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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7th, 2009 at 8:08 am
로렌스 / 우리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분들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겠지요. 이를 발설해서 살피느냐, 말없이 결연히 되새기느냐는 저마다 가진 성정의 차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참에 동감해서 이 사순 여정에 같이 참여해주는 길동무와 대화도 하게 되고요.
다른 독자를 위한 덧붙임: 제 블로그의 단골 댓글 손님 가운데 “로렌스”는 두 명입니다. 서로 동명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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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0th, 2009 at 10:43 pm
[…] 교회에서 내는 최소한의 성명서에 대해 운운했는데, 때마침 이메일로 “기도 요청”을 호소하는 글을 받았다. […]
April 7th, 2019 at 1:39 pm
그래도 왕년(전통)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왕년을 이야기 하면서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는 기회가 되지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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