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제직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지난달부터 성직 서품이 곳곳에서 있다. 새로운 사제들이 나오고, 부제들이 나온다. 당사자들은 서품 전례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겼을 테다. 예년과는 달리 몸이 참석할 수 없으니, 멀리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합하여 축복한다.
어떤 이는 성직자들 안에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전해온다. 한 개인의 지향과 영성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신자요, 사목자이겠으나, 특정한 전통의 공동체(성공회) 안에 녹아들어 그 책임을 지는 ‘사제’인지는 모르겠다는 고민 어린 비평이다. 어느 틈엔가 어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빌미로, 사제 개인들은 공동체의 전통 안에서 받은 사제직의 실천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곤 한다는 불만이다. 시쳇말로, ‘몸은 이 교단에 두어 옷까지 걸쳐 입었는데, 사고와 행동은 전혀 딴 동네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다.
살펴본다. 사제직 ‘본연’에 대한 끝없는 반성은 필수적이다. 규정된 기능과 행동만을 요구하는 교회 조직의 권위주의가 세를 부릴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런 반성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 저항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만연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에 휘말려, 특정 전통의 공동체 안으로 서품받은 일을 잊거나, 애써 모른 체하려는 게 보인다는 걱정이 일기도 한다. 대체로 ‘본질주의’는 핑계의 한 방법이다. 사정이 걱정하는 그대로라면, ‘평신도’ 사목자로 남되, 그 특정한 교단 전통의 성직자로는 자처하지는 말 일이다. 어쨌든, 그 의미의 ‘본연’과 그 특정한 공동체 전통의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매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사제직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자신은 평신도로 식별하여 살았던, 스트링펠로우에게서 몇 마디를 인용하여 되새긴다. 이는 교회와 사제직에 대한 ‘본연’의 고민일 테니, 다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겠다. 이를 씨줄 삼아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성직자와 교회는 각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드러내야 하는 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는 교회 전통 안에서 경험하고 논의하며 정리한 내용들과, 서로 다른 맥락과 현장의 경험과 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화를 부추겨 계속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성서가 기술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교류와 격동, 갈등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대신해서 살아간다.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낯선 이요, 이방인이다. 사회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성서가 그리는 교회의 표상은 세상의 사람들과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져서 그 사회에 거스르는 행동을 피하는 도피주의의 종교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자들은 성사적 예배로 모여서,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몸의 구성원들은 세상을 대신하여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사제직에 서품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그 사제직과 사목 활동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을 세상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임(congregation)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그 몸의 구성원에게 펼치는 사목 활동이다. 그 관계의 양상은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제직의 사목 활동은 교회,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교회의 극도로 복잡한 생명 활동을 향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여, 그들이 세상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게 쓰도록 돕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보살핌을 간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이 사목 활동은 고해 성사의 활동이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임무와 증언을 듣고, 그 몸의 구성원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뤄가야 할 다른 모든 구성원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사목 활동은 교회의 전통, 즉 성령 강림 사건 이래 펼쳐진 선교 사명과 그 일관성을 보살피며 지켜나가는 활동이다. 이 사목 활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과 거룩함에 투신하는 것이다.
William Stringfellow. A Private and Public Faith, 1962.
July 1st, 2010 at 8:13 pm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로 비유이자 또 글을 읽어가면서 그것은 비유가 아닌 직설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종교적인 혹은 세속에서도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언어들에서 ‘몸’이 갖는 위상이랄까, 그 의미랄까…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몸’과 ‘육체’가 갖는 의미들이 어떻게 변천해왔나… 혹은 현대 그리스도교에서 ‘몸’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뭐 이런 저런 생각이 연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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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7th, 2010 at 12:43 pm
오랜만에 블로그에 왔습니다. 신부님.
요즘 Discernment Process 중인데,
신부님의 이 글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릴께요.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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