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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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마태 25:14-30)

교회력 막바지에서 우리 인생도 명백하게 마지막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을 책임 있게 가꾸는 삶의 준비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제 교회의 삶도 생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저마다 다른 달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는 잘 알려진 만큼이나 오해도 많습니다. 그 핵심은 우리 삶과 교회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깊이 변화하지 않으면 ‘통곡’하리라는 경고입니다.

달란트는 우리 삶과 교회에 맡겨진 선물이자 책임입니다. 한 달란트는 20년 동안 한 푼 쓰지 않고 벌어야 하는 큰돈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달란트 분배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차별이 아니라, 감당할 책임을 헤아린 배려입니다. 행운이든 능력이든, 재산과 학식, 지위와 명예가 높다면 그만큼 책임의 무게와 양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서 본문에 쓰인 ‘더 벌었다’(16절)는 말은 경제 용어가 아니라, 신앙 용어입니다. 투자 이익을 셈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 이루는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의 ‘확장’을 확인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과 교회가 하느님의 영광을 ‘두 배’로 드높이 보여주며 살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느님은 책임 수행의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얼마 뒤’라고 한 공동번역과는 달리, 원문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옵니다. 기회와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오래 견디며 계속 도전하는 일이 신앙생활에서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신뢰와 의지 안에서 우리 처지를 헤아리시어 하느님 나라 확장의 능력과 책임을 주십니다. 신앙인은 성급한 성과에 붙들려 서둘거나 남의 것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신 선물에 기대어서 새롭게 도전할 뿐입니다. ‘성공회다운’ 전통과 전례, 영성과 실천은 우리가 오래도록 견디면서 펼칠 달란트입니다.

시도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용서와 격려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실패의 두려움 속에서 용서의 은총을 맛볼 기회마저 잃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이를 일으키시는 격려의 손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두려움의 결과, 오히려 주인을 향해 비난의 논리를 펴니 애처롭습니다.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여 퍼뜨리는 시선과 언행은 신앙의 질병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야 할 교회가 시기와 질투, 자리 세습과 자기 영역 확장에 빠져드는 오늘입니다. 변화의 시도와 올곧은 비판을 두려워하는 소심함은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힐난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물을 파묻는 교회를 오히려 세상이 걱정하는 형국입니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 더 번 사람에게 주는 일이 부당할까요? 이는 신앙의 용어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머물면, 우리는 ‘통곡’의 자리로 쫓겨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은 매장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캐내어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덤으로 주어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이 세상에 더 널리 드러나도록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작은 인생과 작은 교회에 값진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우리와 교회는 그 선물과 책임을 다하는 신실한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변화냐, 통곡이냐. 이 선택에 응답할 마지막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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