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문 생각 – 기도서의 축일

오늘이 윌리암 템플 캔터베리 대주교의 축일인 탓에 학교에서도 그를 기념하는 미사를 드렸다. 그는 18세기 이후 교회력에 들어 있는 유일한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그가 별세한 10월 26일이 아닌 11월 6일이 왜 그의 축일인지는 알 수 없다. 영국 성공회 [공동 예배](2000)이 처음으로 이 날을 그의 축일로 지정했고, 미국 성공회가 이 날짜를 따랐다. 최소한 영국과 미국은 그가 교회의 윤리적 이상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그의 실천이 현대 성공회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 성공회 기도서(2004)는 성공회 전통 안에 있는 근대 혹은 현대의 위대한 영성가들이나 신앙 위인들을 교회력에 넣는 일에 인색하다. 10월 26일은 ‘채드’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인물, 그리고 11월 6일에는 ‘레오나드’라는 6세기 은수자의 축일로 한다.

현대의 성인 몇을 교단 전통을 막론하고 넣긴 했다. 마틴 루터 킹(4월 5일), 본회퍼(4월 9일)가 그렇다. 탁월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타의에 의한 죽음으로서 순교에 대한 남다른 존경이 비친다. 그러나 그 선택마저도 대중적인 인물, 혹은 교단적인 전통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독재에 저항하다 순교당한 우간다 성공회의 자나니 르움 대주교나, 천주교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엘살바도르)는 찾을 수 없다.

현행 기도서 직전에 나온 [교회 예식서](1997) 작업에서 교회력 부분을 따로 맡아 크리스토퍼 존 수사와 함께 제안서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근거나 상관성이 떨어지는 성인들이나 인물들을 대폭 삭제하고, 성공회 전통과 정신, 그리고 근-현대 그리스도교 역사에 하느님 선교의 증인이 된 인물들을 넣으려고 애썼다. 성공회 신앙 전통을 다양하게 대변하는 웨슬리 형제, 존 키블, 프레데릭 모리스 등이 그러했고, 물론 마틴 루터 킹, 본회퍼, 로메로 대주교 등도 포함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성서의 여러 성인들을 위해서 구약 성서, 신약 성서의 성인들 축일을 넣어, 교회가 어떤 이름 없는 성인들의 삶을 다시 기억하도록 도우려 했었다. 신앙의 족적과 하느님의 선교의 증언은 굳이 순교를 해야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작업이 어디 구석에 남아 있을 터이나, 우리 기도서에서는 흔적이 아련하다.

6 Responses to “꼬리 문 생각 – 기도서의 축일”

  1. 혜이안 Says:

    저는 안병무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 권정생 선생과 마크 트롤로프 주교의 기념일 추가를 강력 추천합니다.
    그리고 이왕에 추가할 거, 조선에서 정치적 이유로 순교한 천주교 성인들의 축일도 명확히 언급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치명(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일과 518도 당연히 추가해야겠죠.
    국제적 인물로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과 칼 바르트와 칼 라너 신부와 가가와 도요히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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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우로 Says:

    제 생각에는 성공회가 종교개혁이전에 기념한 성인들의 축일, 모든 순교자의 날은 교회의 전통으로 존중하여 그대로 놔두되, 전태일 열사,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날, 제주 4.3민중항쟁 희생자들의 날(성공회내 보수적인 분들이 항의할지도 모르겠는데..)도 넣는게 어떨까요? 그리고..
    – 가가와 도요히코: 일본의 장로교 목사, 기독교 사회주의자. 사회개혁자.
    – 구리바야시 데루오:일본 개신교 신학자. 예수의 가시관에서 부라쿠민(천민계급)들의 아픔을 발견한 가시관의 신학 정립(자세한 것은 제 블로그 참조)
    – 전태일 열사: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감리교인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전태일 열사도 기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휴 레티머 주교: 메리여왕때 화형으로 순교한 영국 성공회 주교. 한국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토마스 크랜머 주교만 기념되고, 휴 래티머 주교는 소외되고 있음. 유언: 오늘 우리는 결코 꺼지지 않을 하느님의 빛으로 영국을 빛낼 것입니다.
    – 칠레의 무명의 가톨릭 순교자 : 칠레 국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다가,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살해당한 7분의 칠레 가톨릭 교회 사제.
    – 존 코프 주교, 마크 트롤로프 주교 등 : 한국 성공회의 뿌리들이니, 당연히 추가되야 함.
    참고로 기독교장로회 성직자인 고 문익환 목사님은 작년에 성공회 선교교육원에서 출판한 2007년 어린이 공과교재에 고 주기철 목사님, 디트리히 본 회퍼와 함께 신앙위인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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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바우로 Says:

    참 비 기독교인도 괜찮다면 아옌데 전 칠레대통령도 좋겠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1973년)으로 자살해야 했지만, 미국과 자본가들의 경제파탄공작과 맞서 싸우며, 소수 부유층들의 부의 독점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와 빈곤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한기총따위의 기독교 우파들, 시쳇말로 보수골통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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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fr. joo Says:

    혜이안, 바우로 / 좋은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들 기억해야 할 훌륭한 분들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교회력에 이름을 올려서 기념하는 일에는 복잡한 기준이 작동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성인 축일은 아예 축일 자체의 의미를 가볍게 하기도 하고, 주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시간 이해에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교회력에 올라있는 성인들 혹은 신앙의 어른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삶을 돌이켜 볼 내용과 겨를도 없으면서 교회력에 올려 놓아야, 치장말고는 될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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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요한 Says:

    그러게요;
    전에 가끔 교회에서 토요일 만도를 드릴때
    ‘아무개’ 기념일 혹은 축일인건 알겠는데,
    뭐하던 사람인지는 알려줘야 기념을 할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예배 끝나고 혼자 인터넷을 뒤졌던 기억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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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본회퍼 –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Says:

    […] 애비에 새로 세워진 순교자 입상에 그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 한국 성공회도 2004년 기도서 이후로 그를 기념한다. 그는 독일 루터교의 신학자요 목사로, 나치에 항거하고 히틀러 암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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