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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3

Saturday, December 20th, 2003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The Most Revd. Dr. Rowan Williams,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성탄절에 즈음해서 우리가 부르고 말하는 성탄 노래들과 기도들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하깨 2장 7절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예수님은 “뭇 민족의 열망”이요,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는 분이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만나고픈 분입니다. 모든 인생의 중심과 목적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편 우리는 “여관에 머무를 방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성탄 노래는 “이 바쁜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없다고 말하고, 또한 처음부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 때 이분은 인생의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어떤 혼란의 표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이신 것처럼 참 하느님이시라면, 아무리 우리가 그분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분이 우리 세상에 꼭 맞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직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의 작은 머리로 헤아리기에는 너무나도 신비롭습니다. 그 까닭에 우리는 그 목적을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길들을 비켜나가려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변으로 내치고, 그분이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일들의 뜻을 피해가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삶과 사랑과 조화할 때라야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현존, 그분의 인격적인 존재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이 깊은 장소를 발견하기 위한 매우 긴 여정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 여정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변으로 보이는 것이 진정한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낯선 분이기도 하며, 또한 그 누구보다도 우리 가까이서 친밀하게 말씀을 건네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이야기와 노래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우리 자신을 꿰뚫어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동방박사의 여행을 다루는 T.S.엘리엇의 시는 세 명의 현자들이 가졌을 의문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안내 받은 이 길은 새로운 탄생의 길인가? 아니면 죽음의 길인가?” 그 답은 ‘양쪽 다’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생각에 따라 바라고, 우리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은 죽어야 하며, 새로 태어나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자신, 즉 인간 안에 나타난 참된 하느님의 모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교회를 뒤덮고 있는 엄청난 불확실성과 혼란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논쟁들을 단번에 해소할 만한 해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이러한 논쟁들이 복음의 나눔이라는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기를 통해서 우리는 진리가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를 막론하고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며, 그분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분이며, 동시에 지극히 낯설고 풍파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진정한 중심을 찾기 위한 우리 마음의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이 여정은 반대자를 무찌를 수 있는 좀더 나은 논거를 찾자는 것이 아니요, 교회를 구하려는 좀더 나은 계획을 만들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여정을 통해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처음 만났던 사람들처럼 좀더 큰 두려움과 놀라움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엄청난 신비에 대해서 다만 조금 진전된 깨달음과,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던져주는 질문들을 가지고 이 분열되고 불완전한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힘겨운 일들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이웃의 실패에 몰두하기 전에, 우리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우리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먼저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에 우리의 중심과 주변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의 관심과 염려에 따른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중심을 찾는 길입니다.

천사들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목자들은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보자.”

*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홈페이지와 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되었습니다.

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Thursday, November 20th, 2003

미국 교회에서 12명의 최고 설교가로 손꼽히는 미국성공회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신부의 글을 번역해서 나누고자 한다. 동성애 문제로 논란이 가속되는 가운데 어떤 신앙의 기준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The Rev. Barbara Brown Taylor
(미국성공회 사제, 피드몬 대학 및 컬럼비아 신학교 교수)

4 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리안 논쟁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을 하지 않고서는 빵 반죽을 사러 가게가 갈 수 없을 정도라고 쓴 적이 있다. 그분은 영원한 성부의 영원한 성자인가? 아니면 그분이 그렇지 않은 특정한 시간이 있었는가? 이 문제로 어떤 주교들이 다른 주교들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황제가 끼어들어 이를 조정해보려는 동안에, 이 논쟁은 도시의 거리에도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는 요한복음에서 뽑은 구절을 내세웠고, 아리우스파는 마르코복음에서 나온 구절을 가지고 응대했다.

초대 교회사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 후대에 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런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 페이퍼에 점수를 매기는 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2003년도 미국성공회 총회가 있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전역에서 대표들 과반수가 세계성공회 사상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주교로 뽑힌 진 로빈슨 신부의 선출을 인정해 주기 직전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아 주 북부는 어떤 점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와 비슷해지고 말았다. 성공회 신자들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고서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 일로 주먹다짐이 있었다는 소식은 보고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논쟁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재정 문제까지 위협받고 있다. 게다가 이 논쟁은 발끈 달아오른 몇몇 성서의 구절과도 결부되었다. 로빈슨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복음서의 구절들을 선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로 서신의 구절들을 들이대고 있다. 이 불꽃 튀는 접전을 보고 있노라면, 4세기의 안토니오 성인이 문명사회를 벗어나 광야로 피신한 까닭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누가 자기편이 되느냐에 따라서 뱀과 하이에나가 멋진 한 조를 이룰 형국이다.

내가 시장에 나가는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가 동성애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저“삶”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하나의 역사인데,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우 중대한 부분을 맡아서 움직이고 있다. 사실 동성애 “이슈”를 접하게 되면, 나는 일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큰 이슈를 머리 속에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비늘 같은 것이 내 눈을 덮고 마는 것이다. 대신에 나는 그저 내가 학교에서 튈지 안 튈지를 걱정해주었던 가정교사를 생각한다. 나는 사제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 주는 사제를 발견하고, 또 월말에 이르러 음식 살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통닭 한 마리를 구워준 교수님을 눈에 그린다. 또 에이즈(AIDS)로 죽어갔던 젊은이들 열 몇 명의 얼굴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마지막 삶을 불태웠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16살 먹은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며, 여전히 진정한 첫사랑을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그는 혹시라도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느껴지면 바로 자살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들이 내 시선에 그려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을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마치 얼굴 없는 몸통만 바라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 때 성문제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길이며, 우리가 가진 양쪽의 진리를 좀더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태도를 거의 포기한지 오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적어도 인생의 이야기가 “진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성서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1950년 전에 쓰인 성서의 다섯 구절 가운데 하나만을 가지고 그 다양한 성서 기자들이 의미한 것이 이것이었네 아니네 하는 일에 달라붙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성서를 사랑한다. 나는 내 반생애를 이미 성서를 읽고 성서를 연구하고, 성서를 가르치고 또 성서의 말씀에 따라 설교하면서 살아왔다. 내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감으로 성서의 모든 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과는 달리 그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닫진 못하지만, 나는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며, 이 만남을 통해서 내 일상의 삶 속에서 신구약 성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내 자신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활 속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내가 성서에서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면 성서는 내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어떤 의도를 건져낼라 치면, 성서는 그 종이에 찍힌 말에 기대어 집을 지으려는 나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성서는 내게 살며시 입 맞추며 세상으로 나를 떠민다. 그리고 약속한다. 하느님을 찾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성서의 페이지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살덩이에도 있다고. 율법서를 읽든지 복음서를 읽든지, 기록된 말씀은 나를 떠밀어, 이 지상에서 그 어떤 갈등과 투쟁, 그리고 깨달음과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이웃들과 함께 정의와 평화를 살아감으로써 그 말씀을 몸으로 체현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이 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다. 즉 성서에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이 신뢰할 만한 것이므로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그 책에 있는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책에 있는 내용을 벗어나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런 다음에 그만 시간이 다됐으니 그만 중지하라는 경고를 무릅쓰고 관행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사랑하는 꺼림직한 결과와도 대면하라는 의미이다.

요즘 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입장으로 들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백도 그렇게 들린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누구를 사랑하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내가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진행되는 일을 조명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걸겠다.

(주낙현 신부 역)

Copyright 2003 by Barbara Brown Taylor. Translation in Korean by Nak-Hyon Joo with permission

성공회의 전통과 정체성

Monday, September 8th, 2003

얼마전 있었던 미국 성공회 관구 의회 General Convention 2003 에서 첫 공개 동성애자로서 주교로 선출된 진 로빈슨 신부에 대한 주교 인준이 있었다. 이를 둘러싼 미국 성공회 및 세계 성공회의 논란과 갈등 속에서 성공회의 전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자료를 번역하여 나누고자 한다. 아래에 내가 공부하는 버클리 성공회 신학교 CDSP 의 신약학 및 영성신학 교수이신 빌 컨츄리먼 신부님의 글을 허락을 받아 싣는다.

성공회 전통과 정체성 – 최근의 갈등에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윌리암 컨츄리먼 신부(The Rev. Dr. William Countryman)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성공회 신학교 (CDSP)
신약학 및 영성신학 석좌 교수.

많은 교회들이 우리 시대에 직면하는 많은 갈등 속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우리 성공회 신자들이 이러한 분열하는 다른 교회들의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특별히 성공회 신자로서 겪는 우리의 갈등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은 이러한 갈등에 대한 우리의 처신이 어때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이 질문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우리 성공회 신자들이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성공회 정신이 아니라, 이와는 전혀 다른 개신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안의 갈등을 이 사회의 문화에 의해 지배되고 있은 어떤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공회적인 길을 통해서 다루려 하고 있는지를 묻고 성찰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이란 종교개혁을 통해서 형성된 성공회 정신의 광범위한 흐름을 뜻한다. 이 전통은 16 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반대하면서 등장했다. 그 하나가 반종교개혁의 로마 가톨릭 정신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이른바 제네바 전통이다. 그리고 제네바 전통의 영국식 표현은 청교도 정신이었다. 대부분의 성공회 신자들은 스스로를 이러한 두 부류의 전통에서 구별하였으며, 특별히 이 두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

이것은 과거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 아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여러 문제들을 이런 방식으로 살폈으며, 앞서 말한 다른 두 전통에 대응해서 성공회 신학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반종교개혁을 통한 로마의 도전은 존 주웰(John Jewel)로 하여금 “영국 교회에 대한 변증”을 저술하게 했으며, 청교도의 도전 때문에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는 “교회 정체의 법에 관하여”를 쓰게 됐다. 후커는 매우 간결하게 이러한 양쪽의 신학적 도전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에 골칫거리로 남아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즉 로마 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제네바 교회는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제1권, 91쪽). 다시 말해 한 쪽은 원칙상 오류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성공회는 성공회 자신을 포함해서 두 전통 모두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매우 세밀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고대로 이어오는 어떤 공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리는 완전한 정통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앙 공동체가 그 삶과 대화 속에서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둔 것이다.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세밀하고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다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교회의 일치 (획일성이 아니라) 안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고 믿는다.

로완 그리어(Rowan Greer)는 4세기의 교부 니사의 성 그레고리(St. Gregory of Nyssa)에 대한 연구 속에서 성공회 신학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신학적 성찰을 전해주고 있다.

”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리 성인은 어떤 교리의 체계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란 헤아리기 힘든 것이었으며, 이 세상은 그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진리로 향해가는 길들을 마련하고, 하나의 진리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을 서술하고자 했다. 그 총체적인 진리는 우리 손에 잡힐 수 없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Christian Hope and Christian Life: Raids on the Inarticulate, p.69).

이것이 바로 성공회 신학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우리를 형성시킨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후커는 실제로 칼빈과 청교도들에게 동정적이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그들의 단호한 확신이었으며, 그에 대한 어떤 오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이와는 달리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은 종종 매혹적으로 까지 보이는 이러한 교리적 확실성보다는, 신앙 공동체의 지속되는 삶과 대화에 가치를 두고 있다. 때로 자신 없어 보이기도 하고, 급기야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면들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이러한 확실성이 그릇된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정직하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기를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어 우리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려고 하는 성공회의 관심 때문에 우리는 매우 큰 방을 갖게 되었다. 하나의 방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우리의 신학적인 실마리를 로마 (혹은 중세 서방 가톨릭 정신)에서 찾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제네바에서 얻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성공회를 함께 유지시켜 왔던 이들은 성공회 가톨릭주의 자들이나, 청교도 혹은 그 후예인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그 동안 성공회를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주역들이었다. 우리를 함께 모아 주었던 것은 신앙 공동체의 삶과 대화를 지속시키는데 관심을 두었던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이었다.

반 문화 전통

우리가 이러한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시도가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는 하나의 반문화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국의 문화적 종교는 제네바 종교요, 청교도의 종교이다. 특별히 이 말은 특정한 방식의 성서 읽기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서는 잘 위장된 규칙서라고 가정하는 방식이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왜 이처럼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규칙을 마련해 놓으셨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다만 설교자들만은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어서, 행복하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안겨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체로 성서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을 갖고 자라왔다. 그리스도교를 접해보지 못한 미국인들도 이것이 교회의 본래적인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특별히 이것은 성공회적인 태도가 절대 아니다. 성공회는 성서를 어떻게 보았는가? 성서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인 접근 방식은 기도 속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이것을 세세한 규칙으로 보고, 하느님께서 성서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청사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혹은 우리 사이에 지속되고, 늘 새로워지는 대화를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17세기 말의 성공회 사제요 시인이었던 토마스 트라헌(Thomas Traherne)이 그의 시 “성서”(The Bible)에서 아름답게 노래했던 기대이다. 시는 감격에 넘쳐 숨조차 쉴 수 없는 심경으로 시작된다.

1.
그, 그거 말이야, 나 이렇게 들었어.
그러니까, 내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어졌다는 거야.
그분의 모습을 따라서, 아 그 거룩하신 분, 그 멋진 금빛.
그 어떤 즐거움도 여기선 모두 기죽고 말지,
그 지극한 기쁨에 비하면, 그건 장난이야.
천상의,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2.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왕인거야.
그리고 죽어 없어질 껍질로 옷을 입긴 했지만,
그 안은 천사 케루빔이야, 천사의 날개도 있고,
천사의 사랑, 그 마음도 들어 있다는 거지.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경계들까지 날아올라 볼까?
이 우주의 행복까지 함께 만끽할 수 있는 거야.

하느님과 그 피조물이 누리는 이러한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전망이 바로 우리에게는 성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목적은 우리를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회 신자들에게 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내리신 이 전통을 지켜나가고, 발전시키며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미국 그리스도교가 청교도에게서 물려받아 이 사회를 지배하는 율법주의에 항복할 수는 없다.

만약 성공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성공회의 풍요롭고 존경스러운 그 대화에 계속해서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완전한 동의 없이도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신앙 공동체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 전통을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뻔하다면서 우리를 떠나간 사람들이 그전에도 있었다. 청교도들이 그 첫째요 가장 분명한 사례이다. 아마도 미래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떠남을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과 권한은 우리가 받은 이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축하하고 나누는 것이다.

(주낙현 신부 역)

Copyright 2003 by L. William Countryman. Translation in Korean by Nak-Hyon Joo with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