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012

잡감 – 권력의 식별과 구원

Tuesday, February 14th, 2012

성인들이 드러낸 영성의 핵심에는 늘, 기꺼이 ‘루저’가 되는 행동이 있다. 그런데 성인들의 삶에 깃든 영성을 팔며 소비하는 이들에게서 ‘성공’과 ‘업적’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자주 엿보인다. 게다가 그 도통함은 종종 권위주의적이고 탐욕스럽기까지 하다.

삶은 권력관계다. 자신이 얽혀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섬세한 자각과 성찰이 없이는 개혁이니 진보, 영성이니 도통이니 하는 것들은 대체로 의식/무의식의 자기기만이다. 그러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사학에 불과한 일이 많다.

자신들에게 도전하면 ‘응, 다 알아’, 혹은 ‘너희는 복잡한 속내를 몰라서 그래’라며 입을 막곤 한다. 그러나 자신을 예외로 두고는 변화는 없다. 이를 살피지 않고 영성을 말하고 도통한 척들 하니 소위 ‘진보적’ 교회 꼴이 어떻겠나?

80년대를 거친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운동권 신학이, 이후에 성취한 기득권과 만날 때, 더욱 공고한 권력체계를 구성한다. 그 나이브한 낭만성에서 비롯한 진보의 수사학이, 그 세대의 강렬하고 ‘유니크’한 경험에서 비롯된 문화가 지배하는 구조가 만났기 때문이다. 그 수사학은 혹하도록 멋지지만, 텅 비었다. 한편, 그것을 참을 수 없기에 관습화한 권위주의로 바꿔 채운다.

결국, 열망이 식은 자리를 탐욕이 대신 꿰찬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 열정이라 우긴다. 그 열망을 부인하면 자신의 기득권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식별에서 핵심은 열망과 탐욕을 식별하는 일이다.

갖지 못한 이들은 열망하되 탐욕할 수 없다. 이들이 험하고 거친 것은 탐욕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 때문이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여전히 영적 식별을 하려 한다면, 이제 타자가 된, 그리고 타자의 고통스러운 열망에 귀 기울여 자신의 초심을 되살릴 길밖에 없다.

구원은 늘 밖에서, 그리고 깨진 틈 사이와 상처에서 온다.

주디 콜린스 – 아버지

Thursday, February 9th, 2012

주디 콜린스(Judy Collins)가 쓰고 노래한 ‘아버지'(My Father, 1969)를 거듭하여 듣다가, 마음이 동하여 우리말로 옮긴다.

주디 콜린스가 부르는 <아버지>

니나 시몬이 부르는 <아버지>

아버지는 늘 약속하셨지
우리는 프랑스에 살게 될 거라고
센느 강을 따라 배를 탈 거라고
그리고 나는 춤을 배우게 될 거라고

그때 우리는 오하이오에 살었었지
아버지는 광산에서 일하고 계셨지
아버지의 꿈 위에 배처럼 올라 타고
우리는 언젠가 배를 저으리라 생각했지

머지 않아 언니들은 다들 떠나갔지
덴버로, 샤이엔으로,
다들 자라 결혼하는 언니들이 꾸는 꿈은
라일락과 남자였지

가장 어린 나만 여전히 남아
혼자서 춤을 췄고
아버지가 꾸던 꿈의 색깔은
바래갔지, 소리 없이

지금 나는 파리에 살고 있네
우리 아이들은 춤을 추고 꿈을 꾸네
한 광부의 삶이 걸어온 길을 들으며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고향의 기억을 따라 노 저어 올라가네
센느 강 위를 가르는 배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눈 위에 다시 저무는
센느 강의 태양을 바라보네.

아버지는 늘 약속하셨지
우리는 프랑스에 살게 될 거라고
센느 강을 따라 배를 탈 거라고
그리고 나는 춤을 배우게 될 거라고

나는 고향의 기억으로 노저어 올라가네
센느 강 위를 가르는 배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눈 위에 다시 저무는
센느 강의 태양을 바라보네.

(번역: 주낙현 신부)

Hannah120205.png

노래는 잘 못하지만, 작가를 꿈꾸는 우리 딸은 나중에 어떻게 제 아빠를 기억할까?

신앙 멘탈리티의 틀, 그리고 마커스 보그

Thursday, February 9th, 2012

십수 년 전, 동료와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여러 근본주의 ‘기독교’ 교단들이 성공회를 비난한다는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위 근본주의적 개신교는 아예 우리와 다른 종교라고 여기고 접근해야 해요. 실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에요.”

지금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한다. 근본주의라는 종교 안에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등의 내부 분파가 있을 뿐이다. 누구를 규정하고 구획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병증, 혹은 환부라고 분명히 진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인 탓에 다른 여러 건전한 종교들과도 친연성을 나누기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탓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려, 몇 해 전부터는 성공회 전통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는 ‘개신교 멘탈리티’의 폐해를 몇몇 분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물론 이때 ‘개신교 멘탈리티’란 영미에서 발전한 독특하고 배타적인 복음주의와 연결된다. 그 특징은 전례와 성사에 대한 무지와 거부, 전통에 대한 몰이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접근, 그리고 창조 신학과 성육신 신학을 오해한 지독한 영-육 이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런 특정 형태의 ‘개신교 멘탈리티’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종종 진보 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이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도 비슷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언젠가 적은 대로, 전례적(liturgical) 전통의 교회와 비-전례적 전통의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분은 위에서 규정한 근본주의나 개신교 멘탈리티에 대한 언급에 그대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이해와 형성, 그 실천에 대한 접근에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신앙 형성의 틀이라고 할 만하다. 이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좀 더 적극 펼쳐 나가야 할 참이다.

이 와중에, 마커스 보그의 책 한 권을 들춘다. 성공회 신자인 마커스 보그는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한 짧은 소개와 우리말로 번역된 도서 목록은 여기를 참고할 수 있다. 그 역시 성서와 전통을 보는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전개한다. 현재 통용되는 여러 신앙의 언어와 용어, 개념들이 어떤 틀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아래 이식된 한국 교회에도 적절한 참고서일 것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인듯 하니, 우선 그 고민을 그 책 서문을 통해서 나누려 옮긴다.

마커스 보그,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그 의미와 힘을 잃었는가?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서문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우리 시대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 기본 어휘의 많은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용어들이다. 구원, 구원받다, 희생, 구속자, 구속, 의로움, 회개, 자비, 죄, 용서, 중생, 재림,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서. 게다가 신조, 주님의 기도, 전례 등과 같은 용어들도 그 성서적,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심각하게 왜곡된 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첫째는 근대 세계에 등장한, 언어에 대한 문자주의이다.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슷하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어떤 일반적 틀에서 해석하는 문제다. 나는 이를 “천당과 지옥”의 틀이라고 부르는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종종 그러하듯,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약 절반(아마 더 많을 것이다)의 미국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천당과 지옥’이라는 틀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틀은 죽음 뒤의 문제, 죄, 용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믿음 등을 강조한다. 다른 절반(아마 더 적을 것이다)의 신자들은 이런 틀에 당황해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로 옮겨 간 이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성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대안이 될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길어올린 것이다.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현대적 의미와 그와는 아주 다른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거듭해서,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이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거듭해서,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좀 더 오래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들을 21세기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과 연결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풍요로움과 지혜를 구원하여 재선포하려는 것이다. 실은 이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를 구원하기”라고 붙이려 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받아야 할 말임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구원자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성서적인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다시 말해 ‘구원한다’는 말은 노예 상태, 감금 상태,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로부터 구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구원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이미 예수, 하느님,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핵심에 관한 책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사안들은 여기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전의 책에 나온 사안을 다룰 때에도, 그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각 장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장은 보통 책의 한 장 길이가 되겠지만, 한 두 쪽인 것들도 있다. 다루는 사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설명이 필요하느냐에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이랄 수도 있다. 이런 입문서는 독서법을 가르친다. 독서는 낱말을 구분하고 발음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기존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읽고 듣고,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우리 신앙의 언어를 다시 읽고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