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011

다시, R. S. 토마스 – Via Negativa

Wednesday, May 11t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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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길 Via Negativa

R. S. 토마스

왜 부정인가! 한번도 달리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하느님은 커다란 부재일 뿐
우리 삶 속에서, 그 텅빈 침묵
안에 깃든, 우리가 가는 곳
다다르거나 찾으리라는
희망 없이 추구하는.
우리의 지식 안에, 별들 사이의 어둠에
그분은 깨진 틈을 남겨두리니.
그는 메아리일 것이니
그가 남겨 놓은 흔적만을 따르리니,
우리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그 따뜻함을 찾으려 하느니. 사람을 둘러보며
장소를 찾느니. 그도 마치 그것들을 바라본 것처럼.
그러나 생각을 잃을 뿐.

—
R.S. Thomas (1913-2000), “Via Negativa”
번역: 주낙현 신부

譯註: R.S. 토마스, 웨일즈 성공회 사제, 시인. “부정의 길”(via negativa)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하느님은 ~ 이 아니다”는 식으로 기술하는 방법이다. 하느님은 어떤 인간의 긍정적 기술(via positiva: ~이다)로 잡히지 않는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신학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 / Apophatic theology)이라 한다.

역사와 성찬례 – 죽음의 권력과 생명의 힘 사이

Wednesday, May 11th, 2011

종교개혁은 간단히 말해서 두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16세기에는 평화기가 10년이 채 안 됐고, 17세기 중반까지 고작 2-3년이 평화기였다… 종교개혁은 이미 자라나고 있던 국가라는 권력 기계를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의 옷을 입혀 그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개신교 종교개혁과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이어진 전쟁 속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교회사학자 디어메드 맥컬로흐가 그의 저작 <<종교개혁>> 막바지에서 종교개혁기의 사회적 갈등에 관하여 내린 평가 한 부분이다. 거의 두 세기에 걸친 무참한 희생을 겪고 나서야 유럽은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지혜에 다다랐다.

‘교리’를 내세운 진리 소유 여부로 복잡다단한 삶의 결을 잘라내려는 무모함이 늘 문제였다.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의 한 장을 덮으려 할 때, 그 무모함이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함부로 누구를 발길질하고 억누르고 목숨을 빼앗는 소식을 듣는다. 강제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역사를 마주한 여러 시선에서 나온 그림과 사진을 본다. 특히 성찬례는 이 진리를 둘러싼 갈등 한가운데 있기 일쑤였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전례인 성찬례가 어찌하여 그 죽음에만 집착해 있었을까?

이단자 화형 Burning of a Heretic – Sassetta (약 1430-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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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제대에서는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다. 축성된 성체 거양의 순간이다. 중세 성찬례 신학의 절정이다. 신앙은 거양된 성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단자’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발밑에서 불이 붙었건만 그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 아래서 얼굴 없는 이는 죽음을 지핀다.

죽음을 끝장내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선사하는 성찬례가 교리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진리 판정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타인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중세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기 내내 지속한 일이다.

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 Caravaggio
(약 159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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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이자 복음서 기자로 알려진 성 마태오의 최후를 그린 그림이다. 그는 성찬례를 집전하는 도중에 에티오피아 왕의 명령으로 살해 당한다. 제대 앞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진 마태오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고, 곁에서 복사를 서던 아이의 입은 그 광경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살인자는 천사를 향한 마태오의 간절한 손은 저지하고, 그 오른손은 이제 마지막 철퇴를 준비하고 있다. 화가는 십 수세기를 넘어 그 사건을 당대의 미사 장면으로 재현했다. 그 안에서 카라바지오 자신은 멀리서 그 참혹한 장면을 무심하게 목격한다.

화가의 목격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그림(Sassetta)에 비추면, 두 제대(altar)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나는 권력자들이 소유한 제대이며 죽임을 행사하는 힘의 제대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사제와 어린 복사가 모인 조촐하고 힘 없는 제대이다. 카라바지오는 이단 화형의 중심이 되었던 제대를,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의 제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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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의 “성 마태오의 순교”는 1980년 봄에 있었던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와 겹친다. 16/7세기라는 당대의 눈으로 1세기 순교 현장을 돌아봤던 화가는 현대에 살아 카메라 렌즈로 로메로의 죽음을 잡아내는 것일까. 화가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할까?

엠마오 만찬 Supper at Emmaus – Caravaggio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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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대속'(atonement)으로 보면서, 죽음 자체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를 의식이나 한 듯, 카라바지오는 이제 성찬례를 친히 세우신 예수를 그려낸다. 이 성찬례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엠마오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와 나눈 식사이다. 죽음이 아닌, 부활의 생명이 더욱 선연하다. 낯선 나그네를 만나 허물 없이 대화하고, 한사코 묵고 가라고 초대해서 마련된 식사이다. 이 대화와 초대가 마련한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는 깨달음으로 놀란다. 그 식탁은 기름지고 풍성하다. 이제 그리스도의 손은 캔버스를 튀어나와 우리에게 닿으려 한다.

오늘 성찬례는 무엇인가?

상처가 이빨을 드러낼 때, R.S. 토마스를 읽다

Friday, May 6th, 2011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 R. S. 토마스(1913-2000)를 찾는다.

세를 부리는 힘들이 사람을 곤고하게 하여, 때로 그에 대한 분노에 자신을 놓아 버리려 할 때. 모두 상처입은 짐승들인 처지에, 그 이빨을 드러낼 때. 아울러 상처입은 사제직의 본연과 긴장을 놓치려 할 때. 질시가 오해를 일으켜 주위에 퍼지고, 모욕과 배신감에 다다를 때. 그리하여 미움과 두려움이 영혼을 먹어치우려 할 때. 그리하여 이때다, 하고 악마가 속삭일 때.

아니, 그저 이름 없는 “시골 성직자”인 벗들이 그리울 때.

굳게 닫힌 방을 뚫고 들어오시어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며 인사를 건네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처럼, R.S. 토마스를 읽는다.


무릎을 꿇고

지극히 고요한 순간들
돌로 지은 교회의 나무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여름날, 하느님을 기다리니
계단 위의 바람이 말을 하고
햇빛은 정적 속에서
나를 감싸느니, 내가 마치
위대한 주역을 연기한 것처럼. 그리고 청중,
빽빽이 모여든 그 영혼들은 가만히
기다리나니, 나처럼,
그 말씀을.
제게 일러주소서, 하느님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제가 말할 때,
그 말 속에서 비록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저를 통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니,
그 뜻을 기다립니다.

R. S. Thomas, “Kneeling”


부활

부활절. 겨울이 드리운 무덤의 옷은
아직 여기에 여전하나, 주님의 무덤은
비었네. 하늘의 사자는
무덤에서 우리에게 말하네
우리에게서 그 돌이 어떻게 굴러가 버렸는지
나무 하나가 그 꽃망울로
어둠에 빛을 밝히느니.
길을 걷는 나그네가 있네
헐벗은 나무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었네. 그리고 한 아이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일러주니
작년의 사건, 기계는
기름이 없어 옆으로 멈춰 섰으나
그 위에 지금 꽃은 만발하고.

R. S. Thomas, “Resurrection” (미출간)


그 환한 밭

나는 보았네. 햇살이 뚫고 들어와
작은 밭을 비추는 모습을
한동안, 내 길을 가다가
잊고 말았지. 그러나 그것은 진주였네
값비싼, 그 밭은
그 안에 보물을 품었었네. 이제야 깨닫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줘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인생은

멀어지는 미래를 향해 서둘지도 않고,
지어낸 과거를 그리워하지도 않는 것. 인생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기적에 몸을 돌렸듯
그대 청춘처럼 한때 지나가는 듯한
어떤 환한 빛에 몸을 돌리는 일
그 빛이 그대를 기다리는 영원이리니.

R. S. Thomas, “The Bright Field”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