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007

참된 완덕 – 하느님과 동무하기

Sunday, December 2nd, 2007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요한 15:15

이것이 참된 완덕(true perfection)이니, 노예처럼 처벌이 무서워서 사악한 삶을 피하는 것이 아니요, 장사치들처럼 거래하는 마음으로 덕행을 하듯이, 보상을 받고자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과 약속으로 보장된 것들을 업신여기며, 하느님의 우정에서 멀어지는 것만을 오직 무서워할 것이요, 하느님의 친구가 되는 것만을 오직 진실로 가치있는 영예와 소망으로 여깁니다. 내가 말한 바, 이것이 삶의 완덕입니다.

니싸의 성 그레고리 (St. Gregory of Nyssa, 395 CE), The Life of Moses, para. 321.

성인과 죄인

Tuesday, November 27th, 2007

성인과 죄인이 다른 점이라면 오직 하나, 모든 성인은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은 미래가 있다는 것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1900)

몇 가지 불찰

Saturday, November 24th, 2007

어떤 권위에 대해서 자신들이 하면 진정한 “도전”이요, 정당한 “비판”이고, 자신들이 도전받거나 비판받으면, 금세 그걸 “교만”이요, “건방떠는 일”이며, 젊은 녀석이 “가르치려 든다”고 뒷담화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판적/진보적 학자라 자처하거나 교수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서글퍼진다. 그러나 이들을 나름의 학자적 기준에 맞추어 대하고, 대화한답시고 덤벼들었던 불찰이 크다.

의견은 다르더라도 어떤 정서적 유대감 안에서 말을 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지고, 선배된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가히 귀엽게 느껴지고,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유대감이 없거나,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판의 발설자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갖는다. 비판의 대상이 어른들이면, 젊은이들은 그걸 들으며 통쾌해 하며, 동시에 “저 자식, 어른들한테 되게 막하는 건방진 놈”이라는 느낌을 보탠다. 물론 여기에는 젊은이 특유의 질시가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서적 유대감이 전혀 다른 집단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이를 면밀히 분별하지 않고, “재롱떠느라 대들었던” 불찰이 크다.

근거와 논리보다는 정서와 감정의 작용이 의사소통에서 더욱 직접적이고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게 통설이다. 그래서 감정을 건드리는 감각적 “말”보다는, 같은 내용이라도 “글”로 쓰면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감각적 총화인 “말”의 감정 자극적 요소를 미리 세심히 살피지 않고, “요이~ 땡”하고, “이번 시간만은 근거와 논리를 갖고 이야기하는 게임입니다” 하고만 선언하고, 청중도 그렇게 듣고 대화하리라, 믿었던 불찰이 크다.

어떤 사람이 흘리는 “아우라”(aura)는 “도통함”이 아니면, “의뭉함”이다. 겉모양은 비슷해도 속은 전혀 다르다. 그 속에 따라 전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또 그렇게 다룰 줄 알면, 도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 저마다 얽혀 있는 복잡한 우월감과 열등감을 상향 평준화하여, 일괄 평등 처리하는 것이 깜냥에 평등주의 원칙의 적용이라고 판단했던 불찰이 크다.

이런 모든 일에서 보듯이, 내 안에 이런 미욱한 것들이 널려 있음을 알면서도, 이게 용기겠거니 하고 무시했던 불찰이 더더욱 크다.

그런데, 이런 불찰들을 피하려면 아내에게 검열받고 귀 기울이는게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