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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해 본 질문과 도전 – 미국 성공회를 향해서

Monday, April 4th, 2011

세계 성공회 안에서 이어지는 여러 논란에 대한 내 생각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말했다. 그 전개가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니 이전에 적은 관전평과 판단도 그대로다. 그러니 더 적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사자들과 만나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성공회의 시각과 방향을 물을 때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저 외교적 언사로 누구 편이 되어주는 것보다는, 비판적인 질문과 도전을 던지는 일이 더 중요하겠다. 짧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문제의식과 그 방향을 잡고 질문하고 도전했으면 한다. 그것이 서로 도우며 자라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원칙도 정리할 수 있고, 자기비판의 근거와 방법으로도 삼을 수 있겠다. 미국 성공회를 향해서, 특히 주교원에서 발언한다면 이런 내용을 희망해 본다. (발뺌: 다른 이의 위치와 입을 가상하여 급하게 ‘초안’한 생각일 뿐이다.)

여러분도 아시고, 계속해서 기도하시는 바와 같이, 일본과 일본 성공회가 겪고 있는 희생과 고통을 깊이 느끼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본에 있는 사람들과 일본 성공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시고 지원해 주십시오. 이 거대한 고통과 슬픔의 사건 속에서 피조물은 우리 인간 모두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하느님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과 한국은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을 나누고 있으며 일본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여기저기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성공회와 일본 성공회는 서로 협력하여 이 역사적 고통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는 초창기에 양국의 많은 사람은 우리의 이런 화해 노력을 의심했습니다. 아직 미움과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양 교회는 계속해서 양 국민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일했고, 이제는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함께 애쓰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이런 우리 노력을 알아차리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미국 성공회, 특히 미국 성공회 정의평화위원회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 성공회가 이러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바로 약자들과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이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른 것입니다. 한국 성공회는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 살아갑니다. 보수적이고 거대한 여러 다른 교단들이 지배하는 처지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음이 우리에게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작은 이로서 우리는 작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이들 속에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을 통해서 미국 성공회와 세계 성공회의 일치 문제를 고민해왔습니다. 한국 성공회 주교원은 이미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 문서에 대해서 주교원의 생각을 세계 성공회 사무소에 전달했습니다. 한국의 주교들은 어떤 ‘문서’로 우리의 신앙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계약 문서가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classical Anglican tradition)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계약 문서가 누군가를 배척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배척당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에서 배척당한 이들을 포용하는 여러 교회의 선교와 사목은 그리스도의 선교와 사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미국 성공회는 그 대가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포용과 환대의 사목과 선교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과 함께 하는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과 깊은 연대의식을 나눕니다.

아시아와 세계 성공회의 작은 교회로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과 도전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 원칙은 힘없는 이들에 대한 경청입니다.

첫째, 세계 성공회 안에서 미국 성공회는 세계의 힘없는 이들과 함께 했습니까? 특별히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저지를 때, 미국 성공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비록 오해이긴 하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은 미국과 미국 성공회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여러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LGBT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실천은 예언자적입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은 여러분의 노력을 부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이야기로 취급합니다. 이 오해를 극복하려면 여러분은 미국이라는 제국에 도전해야 합니다. 또 이 논란을 통해서 여러분과 미국 성공회가 세계 성공회에 있는 힘 없는 이들에게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계 성공회의 다른 이들을 더 방문하고 더 초대하며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 설정한 예언자적 행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둘째,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윈저 위원회가 요구한 핵심적인 내용은 “잠정중지”조치가 아닙니다. 가장 핵심은 경청 과정(listening process)입니다. 그런데 이때 누구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세계의 주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몇몇 유명한 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아닙니다. 힘없는 이들입니다. 목소리가 없는 이들입니다. 미국에 앉아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의 주교들을 통해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그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첩첩이 숨겨져 있습니다. 복잡한 연유로 싸인 겹을 어떻게 펼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더 깊이 투신해야 합니다. 더 많이 관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미국의 소수자 문제에 집중하는 만큼 세상의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 성공회와 더불어 여러 다른 나라 성공회는 세계 성공회가 필요합니다. 세계 성공회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측은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연대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세계의 힘없는 이들, 그리고 힘없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성공회는 “성공회 계약”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아직 모릅니다. 작은 교회로서 갖는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과 상관없이 한국 성공회는 계속해서 우리의 선교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작은 이들과 배척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선교와 사목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과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어떤 조건에서라도 우리의 연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의 회복: 오직 성서, 교도권을 넘어서

Wednesday, March 30th, 2011

전통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어쩌면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주장과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주장의 대결이 드리운 서구 신학의 그늘을 벗기려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앞서 옮긴 이브 콩가르의 1960년대 저작은 ‘전통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전기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전통주의에 대한 비판의 한 방식이었다.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근대 전례 운동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 그리고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은 그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차원과 방향과 심도는 그 다양한 정치-사회적 맥락만큼 각각 다르다.

21세기는 좀 더 다양하게 그 전통의 내용물을 찾아내고,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며, 아예 그 자체로 좀 더 풍요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 각인된 ‘오직 성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이어서, 특히 신앙인의 좁은 이해를 부추긴다. 그 반대편에서는 전통주의로 회귀가 돋보인다. 포스트모던의 혼란에 대한 반대급부로 확실한 답변을 제공하는 근본주의가 더욱 세를 떨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전통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며 콩가르의 이해를 잇는 ‘전통’의 재발견 기획은 어디서 찾아볼 것인가?

20세기 신학의 마지막 거장인 존 매쿼리(John Macquarrie)가 “(영국) 성공회 신학의 미래”라고 평가한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의 기획을 엿본다.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문화) 전통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기획이라고 하겠다. 그 기획은 역시 고전적인 성공회의 기풍(교의신학보다는 전례와 문학적 언어에 기댄 ‘신학하기’)에 잇닿아 있거니와, ‘성서와 교리’에 집착한 서구 신학의 오랜 그늘을 넘기 위한 조심스럽고도 원대한 신학적 기획으로 읽힌다. 이런 ‘서구’의 대안적 기획은 한국이라는 맥락에 어떤 자극을 주며, 또 한계를 드러낼까?

아래에 데이빗 브라운이 쓴 주요 저작 두 권의 서장을 각각 옮겨 올렸다.

번역 후기: 짧은 경험이나마 여러 영국(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번역했다. 그런데 대부분 읽기 어렵고 짜증 나도록 복잡한 구문을 구사한다. ‘너희는 이 경지를 모르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장치를 여기저기 들여다 놓아 독서를 방해하는 일이 잦다. 한마디로, 글 품새가 어지럽다. 이러면 번역은 특히 괴로운 일이 된다. 오역은 분명히 내 탓이지만, 그 책임의 일부를 저자와 나눠야 덜 억울하겠다.

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 데이빗 브라운

Wednesday, March 30th, 2011

제자도와 상상력: 서장

데이빗 브라운

이 책은 전통의 역할에 관한 두 권의 책 가운데 둘째 권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주제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주제는 ‘제자도’이다. 첫째 권인 <<전통과 상상력>>에서는 좀 더 너른 캔버스에서 작업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타 종교의 중요성, 고전 세계에서 신화의 역할, 그리고 계시에 대한 변화된 생각을 두고 진행되는 현재의 논점을 통해서, 성서와 이후 교회 역사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제안했다. 이를 서로 대립시키기보다는, 계속 전개되는 전통을 성서와 역사라는 엔진을 돌리는 동력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교회를 변화하는 사회의 조건들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가능태로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계시의 통찰은 절대로 정경의 체계에 제한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이후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동등하게 말씀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진보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후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와 교회가 때로는 똑같이 오류를 드러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 나온 것들에 대한 좀 더 효과적인 비판을 성서 시대의 통찰에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여기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다른 수많은 신학자의 작업이 이미 능숙하게 다룬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함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계속 전개되는 전통이야말로 그 성서적인 기원을 보완하고, 심지어는 ‘교정’하기도 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역사적 계시를 주장하는 까닭에, 어느 역사적 과거에 확고하게 근거한 것만을 바르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할 유혹에 빠진다. 그 역사적 계시는 원래의 관점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책과 이전의 책에서는 열려 있는 궤적들을 논점으로 삼는다. 그 궤적들은 전통에서 나왔으며, 전통의 함의를 새롭게 읽도록 하며 그 전통에 기대어 다시 돌아오는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전통과 상상력>>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사례를 들어 제공했다. 그 사례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앙의 조상 이야기, 그리고 신약성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이야기, 또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자기 이해 안에서 변화를 겪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우리의 초점은 약간 다를 것이다. 교리 문제도 종종 다루겠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은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실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의 첫 장은 문제에 집중하려는 방편으로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변화된 태도들을 살핀다. 그리스도를 인간이자 주님으로 연결하는 것이 오직 신약성서를 통해서만 매개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주장한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주장의 확증을 찾는다. 성인 숭배의 등장을 설명하고 최근 소설이 제공한 사례를 들 것이다. 3장에서는 이러한 발견이 제자도의 사회적 차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이루는 성인과의 상통을 그저 부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개념 틀, 즉 좀 더 정확히 의미로, 인간의 제자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1부에서 제자도가 한 공동체 안에서 모방과 관계로서 구성된다는 전반적 구조를 다룬다면, 2부는 몇 세기를 걸쳐서 일어났던 고통과 가족과 성에 관한 태도의 변화를 다룬다. 그 변화의 두 가지 형태는 각각 욥기와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통해서 매개되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나는 교회가 그 (역사적) 전개의 다양한 마디에서 일어난 것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러므로 내 주장은 우리가 지금 알게 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늘 처음이라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똑같이 주장한다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판단은 물론 권위와 진리에 관한 중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후자 문제의 적합성이 이 책을 전반에서 논의되지만, 이 두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3부에 있다. 3장은 천상에 있는 공동체의 일치에 대해서 다룬다. 6장은 교회의 지금 현실을 다룬다.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그 갈등은 공동체의 자기 이해 성숙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정통의 성장에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된 인식이 여전히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 하더라도, 어떤 문제를 완전히 해결되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모든 신앙적 진리를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겠고, 어떤 점에서 분명히 그러하기도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혹은 역사적 진실이 밝히는 내용보다 더 그럴 수 있겠는가. 진리의 방식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는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특별히 진리가 비역사적이고 허구적인 것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처음에는 허구적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성인들의 삶은 계속되는 상상력이 관여하여 다시 쓰이고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혹이 있다. 이후에 나온 판본은 그 어떤 실제 사실과 일대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들은 열등한 형태로만 그 진리를 매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때로 허구적 이야기가 더욱 심대하고 의미 있는 진리를 체화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전통은 거룩한 실재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전유를 우리 자신의 제자도 안에서 붙잡게 하며, 그 지속되는 전통을 가장 잘 보전하는 힘은 상상력이다.

책 마지막에 참고문헌은 달지 않았다. 대신에 각 장에서 특정한 저술이 처음 언급될 때 그에 대한 세부 서지 사항을 찾을 수 있다.

* David Brown, Discipleship and Imagination (OUP,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