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009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Friday, April 10th, 2009

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그 기반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듯이, 그래서 결국 처형으로 마감되었듯이,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늘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 – Johann Baptist Metz)이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인간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가해자들에게는 그 사건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시간은 기억의 적이다. 시간은 망각을 부추기고, 거기에 기대어 많은 것들을 숨기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망각을 저지하려는 안간힘과 기억의 장치가 바로 교회력이요 전례력인 셈이다. 그 안간힘을 보지 않고서 전레력을 보면, 그건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전통의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에서 힘있는 이들은 이러한 기억의 장치를 다시 억압의 장치로 바꾸기도 했으니, 전례와 전례력은 만신창이가 되어 저항과 억압이 가없이 되풀이되며 섞이게 되었다.

이 역사의 오랜 갈등이 태연하게 전례의 전통 여기 저기에 남아 있기도 하다. 아니, 그래서 언제든지 균열을 이루며 비집고 나올는지 모른다. 아마 그래서 전례를 둘러싸고 늘 다툼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두텁듯, 전례는 두텁게, 혹은 무감각하게, 혹은 생채기를 건드리며 아직 살아남아 있다.

“위험한 기억”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다가 마무리하지 못하고, 성삼일을 두고 적었던 생각들을 되돌아 본다.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

Monday, March 30th, 2009

1.
여러 죽음의 소식들이 지난 몇 주간 내 자신과 주위를 우울하게 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야만을 고발하며 한국의 한 여성 연예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저혈당 쇼크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이웃 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전에, 이제 지성에 경륜과 너그러움을 더하여 새로운 목회를 꽃피우던 지인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하셨다. 그동안에 이웃 도시에서는 네명의 경관이 총격에 쓰러졌다. 죽음은 그 자체로 삶 전체를 압도하며 넘실 거리기에, 옆에서 바라보는 처지에서도 할 말을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앞에 침묵과 눈물만을 보탤 뿐이다.

2.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침묵과 눈물 속에서 죽음은 숭고하다. 죽음은 이후에 내내 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더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쓰러진 이가 젊을 수록, 혹은 더 많은 기대를 받던 이일 수록, 무너지는 억장과 슬픔에 비례하여 커지는 그 의미는 비루한 언어로 담기에 벅차다.

그 슬픔의 눈물 안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같은 직종이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아, 나도 준비해야지, 생각한다. 이 순간, 그 죽음의 사건은 타인의 것이 되고, 금새 나는 자신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런데 이게 연민에 의한 감정의 중첩 지점인지, 아니면 타인의 죽음과 내 삶을 거리두기 시작하는 변곡점인지 잘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어려운 걸 보면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마 삶의 자리가 달랐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응시보다, 이내 그와 연관된 이야기거리로 관심이 옮아간다. 때로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딱히 서른 생애를 이 땅에서 몸부림쳤던 삶 자체의 숭고함에 맞춰진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으로 에둘러 실체를 가리고, 귀 막고, 덮어두더라도 그 분노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진실은 감춰지고, 뒤마려운 이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죽음과 삶 자체보다는 이야기거리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가십거리가 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게 된다. 우리가 늘 그들 삶의 한부분씩을 훔치며 소비했던 것처럼.

3.
밥 한숟가락을 물어 목구멍에 넘기려는 찰라, 한웅큼 치밀어 오르는 울컥증과 그만큼의 눈물이 섞이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빈자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긴다. 생의 욕구가 더 큰 탓일까?

4.
장례식은 죽은 자가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이다(적어도 우리 전통의 장례와 그에 대한 내 경험의 해석으로는). 죽은 이를 보내려는 일정이 가져온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훔친 눈물은 금새 지인들끼리 나누는 반가운 히히덕거림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슬픔과 반가움의 결이 어떤 불폄함 없이 겹쳐진다. 우리 삶은 이렇게 겹쳐진 것들도 가득차 있다.

5.
우리에게는 죽음을 설명할 말과 논리가 많지 않다. 때로 종교를 통해서, 혹은 경전의 몇 구절과 그 해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하는 바, 혹은 희망하는 바를 선포할 뿐이다. 엄밀히 그건 설명도, 논리도, 설득도, 심지어는 위로도 아니다. 다만 이 죽음을 대면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의 화두일 뿐.

6.
그렇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분노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일 때, 그 죽음이 조건지어져 있을 때다. 그건 사랑때문이다. 아직 사랑할 일이 많은 이가 이내 꽃피울 그 사랑의 기회를 잃는다면, 그 기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도록 내몰린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기회마저 어떤 이에게서 빼앗아 버릴 때, 그 죽음을 대하는 분노가 스러져서는 안된다.

다시, 삶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복잡한 연민의 중첩 과정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게 악다물며 되뇌이는 말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더 많이 기뻐해야지,””사랑의 기억으로 삶을 수 놓아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서는 안될 일이다.

그 사랑을 막는 것들, 훼방하고, 심지어 훼손하는 것들에 향한 분노가 여전히 살아 남아야,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 죽음과 삶이 숭고한 것은 사랑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침묵과 눈물로 말을 잃는 것도 실은 그 사랑때문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사랑을 앗아가는 것들과 끈질기게 대결해야 한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Tuesday, March 24th, 2009

오늘은 로메로 대주교(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1980)의 축일이다. 그는 미사 봉헌 중에 군부의 총에 암살당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는 미사 동안에 죽임을 당한 대주교는 역사에 두 사람이 있다. 영국의 베켓트 대주교와 엘 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다. 권력은 이들을 재갈 물리고 싶어했다. 그를 순교의 성인으로 만든 이들은 따로 있었다. 엘 살바도르 해방신학과 실천의 상징이었던 루틸료 그란데 신부의 죽음이었고, 대주교를 따랐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들 안에 그란데와 로메로는 살아 있다. 예수처럼.

San_Romero.jpg

아메리카의 성인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 Pedro Casaldáliga 주교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엘 살바도르의 심장에 새겨진
3월의, 고뇌의 24일.
당신은 빵을 봉헌하고
살아 있는 몸
– 당신 백성의 부서진 몸
그 몸이 흘린 승리의 피
– 살육당한 당신 백성, 그 무지랭이들의 피
그것은 기쁨의 포도주로 물들어야 했다, 축마(逐魔)의 새벽!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그리고 말씀은 죽음이 되었네, 다시, 당신의 죽음 안에서
죽음이 되었네, 매일, 당신 백성의 헐벗은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네,
우리의 낡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시 증언할 준비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로메로, 온 대륙의 무구한 희망의 자색 꽃
로메로, 라틴 아메리카의 부활절.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돈과 달러와, 외환으로 암살당했으니.

예수처럼, 제국의 명령으로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버려졌다.
교회의 권좌에 있는 당신의 형제들에게서
(교권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잘난 회당도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듯이.)

당신의 가난한 이들이, 그렇지, 당신과 동행했으니,
신앙 깊은 분노로,
당신의 예언자적 선교의 풀밭과 양떼로,
민중들이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었으니.
당신 백성의 시간은 당신을 축성하여, 하느님의 시간에 거하게 했으니.
가난한 이들이 당신을 가르쳐 복음을 읽게 했으니.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으로 상처받은 형제처럼
당신은 어떻게 울부짖을 줄 알았지, 그 동산에서.
당신은 두려움을 알았지, 전장에 있던 한 사나이처럼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말씀을 전할 줄 알았지, 자유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당신은 제대의 잔과 민중의 잔을 마실 줄 알았네,
두 손을 모아 예배인 봉사에 헌신했으니.
라틴 아메리카는 이미 베르니니의 영광 안에 놓였으니
그 바다의 거품으로 된 후광 속에
놀란 안데스의 성난 하늘 안에
그 모든 거리의 노래 속에
그 모든 감옥의 새로운 갈보리 안에
그 모든 참호의,
그 모든 제대의…
그 자녀들의 잠들지 않는 심장의 견고한 제대 안에서!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그 누구도 당신의 마지막 강론을 침묵시키지 못하리!

Monthly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