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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 연재] 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Saturday, March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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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장미 주일’로 부르는 주일이 교회력에 두 번 있다. 대림 3주일과 사순 4주일이다. ‘장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례 색깔도 장미색을 쓴다. 장미는 그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한다. 하필 왜 참회와 절제의 절기 중간에 이러한 화려한 기쁨이 있을까?

사순절기의 절제 생활이 지금처럼 느슨해진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 전통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금욕, 금육, 금식 등 절제 생활이 엄격했다. 어린이와 임산부, 노약자만 예외였다. 하도 엄격해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에는 작정하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 축제를 만들 정도였다. 지루한 절제 시간 가운데 잠시 휴식을 주려는 것이었을까? 곧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라는 배려였을까? 그도 아니면, 2주 후 다가올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라는 뜻이었을까? 실제로 옛 성서정과에서는 사순 4주일에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사람을 넉넉히 먹이신 기적의 복음을 읽었다. 배고픈 이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일이다. 이런 뜻을 다 모아서 잠시 숨 돌리는 시간을 마련했으리라.

교회력의 역사를 보면,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이 먼저 있었고, 이를 본떠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주제도 비슷했다. 그 참에 장미주일도 같이 생겼다. 원래 이름은 조금 다르다. 사순 4주일(레타레)은 그날의 미사 입당송 ‘즐거워하라(Laetare), 예루살렘아’의 라틴말에서 따왔다. 비슷하게, 대림 3주일(가우데테)도 입당송 ‘기뻐하라(Gaudete), 주님 안에서’에서 따왔다. 다만, 20세기 들어 개정한 성서정과와 전례에서는 이 입당송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주일들에는 성가 선곡에서 기쁨의 주제를 고려하면 좋겠다.

이 두 주일에 ‘장미’를 덧붙인 연유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지배자 신들은 장미를 엮어 화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배자들의 신화를 뒤집었다. 장미를 억압당하고 박해받은 순교자의 관으로 바꾸었다.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자도 가시 찔리는 고난이 있었으나, 그 신앙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뜻이었다.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의 상징은 백합과 장미였다. 장미의 가시는 예수를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리라’는 시므온의 예언과 들어맞았다. 중세에 변형되어 발전한 성모 묵주 기도(로사리오-장미)도 이런 연관이 있다. 11세기에는 로마의 주교(교종)가 장미를 축복하여 지역 교회에 선물했다. 자애로운 신앙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영국 지방에서는 사순 4주일에 ‘어머니 교회’인 주교좌성당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다. 나중에 이 관습이 실제 ‘어머니’를 기리고 감사하는 ‘어머니 주일’로 발전했다.

사순절은 혹독한 절제 가운데서 어둠 속 참회와 빛의 기쁨이 밀고 당기는 체험의 시간이다. 사순 여정 가운데 주일은 뺀다. 절제의 기간이더라도 주일은 늘 작은 부활절인 탓이다. 6세기부터는 사순절 주일 전례에서도 ‘알렐루야’를 생략했으나, 여전히 성찬기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영광송이다. 생략한 ‘알렐루야’는 성목요일에 다시 등장했다가 멈추고, 부활밤에 더욱 큰 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축소된 부활 직전 2주 동안의 ‘고난 주간’에는 성당의 모든 성화와 성상을 천으로 가리거나 얼굴을 돌려 놓았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재를 느끼고 목격하며, 우리 삶의 어둠을 비출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갈망하라는 뜻이다.

역사처럼 신앙도 이리저리 굽이치고 겹쳐 흐른다.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단칼에 정리할 수는 없다. 혹독한 신앙의 수련도 있지만, 그 안에는 신앙인의 연약함을 향한 너그러운 배려도 있다. 배고픔과 갈증, 인간 내면의 어둠 속에서 헐벗은 외로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훈련인가 하면, 기쁨을 향한 희망과 감각을 잊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전례는 이처럼 여러 뜻이 겹쳐져 서로 모순되듯이 존재하고 관계할 때 신앙의 신비를 드러낸다.

[전례력 연재]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Saturday, March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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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 년 경)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모수태고지(3월 25일)는 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 앞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자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전해준 사건이다(루가 1:26-38). 이 이야기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신앙인의 삶과 본질을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만, 세상의 방식과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시골 처녀의 가녀린 몸을 이용하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위에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 용기를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감싸고 동행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고 이 일에 동참하겠다고 응답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동역자로 초대받은 마리아는 이후로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을 도우며 선교에 동행한다.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끊는 슬픔을 경험하고,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처럼 신앙인의 역사가 수태고지에서 시작된다.

교회 전통은 새로운 역사의 시점을 지혜롭게 포착하여 연결했다. 교회는 원래 3월 25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날로 지켰다. 이날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고 믿은 교회는 서양력 ‘A.D.’ (Anno Domini: 주님의 해)에서 한 해의 시작을 3월 25일로 삼았다. 또한, 뜻밖의 소식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 신앙의 출발점과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종착점을 겹쳐놓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잉태하신 날, 곧 수태고지 축일로 정한 이유이다. 탄생은 죽음을 향하지만, 죽음은 인생을 완성하여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에 따라 성인 축일은 대부분 순교와 죽음의 날을 새로운 탄생의 날로 지키며 정했다.

수태고지가 3월 25일인 탓에 성탄절은 12월 25일이 되었다. 만 아홉 달 뒤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성탄절의 기원을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서 찾는 주장도 있었지만, 점차 수태고지와 십자가 사건, 성탄절을 함께 잇는 계산법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앙의 삶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훨씬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수태고지 사건에 담긴 중요성 탓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도 잇따라 발전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는 성모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오해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친밀감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신앙은 자신의 실제 몸과 마음에 낯선 생명과 두려운 사건을 열림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신앙을 ‘어머니’라는 여성의 이미지보다 잘 드러낼 말은 없다.

쉽게 이해하려면, ‘테오토코스’를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라고 풀이하면 좋겠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본이다. 수태고지 사건에서 시작한 신앙인의 여정과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가장 완벽한 제자’로 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일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이래 마리아를 숭배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고(천주교), 이에 대한 불신으로 마리아를 신앙의 생각에서 아예 지우려 한 적도 있었다(개신교). 성공회는 초대 교회 전통에 충실하게 성모 마리아를 깊이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마리아’이다. 신앙인은 생각과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불편하고도 두려운 도전을 받아들인다. 우리 몸을 내어드려 하느님의 뜻이 우리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산다. 혹시나 이런 ‘수태고지’ 사건의 신앙을 잊을까 염려하여,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먹고 마시며 우리 몸 속에 품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마리아이다.

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Sunday, March 12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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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두려움 넘는 낯선 순례 (요한 3:1-17)

낯익고 편한 곳을 떠날 때, 믿음의 순례가 시작됩니다.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그 순례에 동행하는 힘을 확신할 때, 복이 다가옵니다. 받은 복을 움켜쥐지 않고 남에게 끼치고 나눌 때, 우리 삶에 덕이 섭니다. 이 과정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순례를 떠나 낯선 이들을 환대하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이 순례가 생명을 선물로 발견하는 은총의 길이라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두려움을 넘어 낯선 자유와 구원의 성령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득권과 지위를 내려놓아 얻은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저 ‘동네의 높은 아버지’(아브람)에서 ‘세상 전체를 품은 아버지’(아브라함)가 되었습니다. 그는 괴롭고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고 나서야, 오히려 헐벗고 지친 나그네를 품고 환대하며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잃어서 더 큰 복을 누리는 순례의 길이 신앙이라고 그의 삶은 증언합니다. 그는 과거의 세상 권력과 재산을 자기 대에 누리지 못했을망정, 후손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에게서 인간과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합니다. 신앙은 축복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려는 소망을 하느님께 부탁하여 그 대가를 지급하려는 행실이 아닙니다. 진노의 심판을 피하려는 주술행위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우리 삶이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착한 행실은 그 감사의 응답 안에서 기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생명을 함부로 짓이기거나 훼손하는 처사에 용기 있게 저항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과 은총을 지키려는 노력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로 섭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니고데모에게 자유를 선사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들으려다 오히려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려는 수단으로 경전을 읽으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였던 종교 권력자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밤에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얻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잡은 손을 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선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움켜쥐려는 경쟁과 성취는 우리 사회를 더 깊은 낭패와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 삶의 기준을 이 땅에만 두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가치, ‘위에서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향할 때 우리는 새로운 자유로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니고데모에게 우리처럼 감추고 싶은 ‘어둠’이 있었을까요? 세상에서 실패하여 좌절했거나,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에 묶여 스스로 움츠러들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우리를 자유의 바람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존재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바람과 숨결과 성령은 어떤 낭패와 절망의 벽, 장애와 차별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그 성령이 이미 우리 몸 전체에 깃들어 있으니, 이를 발견하고 어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입니다. 경쟁과 권력의 어둠, 단죄와 수치의 어둠을 넘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높이어서 우리 삶과 생명을 회복하시려는 예수님과 함께 신앙인은 오늘도 부지런히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