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 – 마르틴 루터 축일

Friday, October 31st, 2014

마르틴 루터 축일1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전야. 독일 성 어거스틴 수도회 수사 신부이자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95개 조항으로 정리한 교회 개혁의 글을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붙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서막이 열린 순간이었습니다.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분열하여 현재의 천주교와 여러 개신교회로 나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자로서 엄격한 규율을 따르며 죄의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얻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해 괴로웠습니다. 더 깊은 기도와 공부를 통해서 그는 마침내 용서와 구원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온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은총이 그 선물입니다. 앞선 여러 학자와 성직자들의 노력과 성과에 기댄 이 깨달음은 중세 교회와 근대 교회 사이를 잇는 다리이자, 교회 안에서 신앙의 본연을 회복한 분기점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느님과 관계가 깨졌지만,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어떤 조건 없이 몸소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은총을 깊이 성찰하여 사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성찰은 한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예배와 인간의 선행은 바로 이 은총에 응답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과 은총의 신학’을 바탕으로 루터는 당시 타락하고 엇나간 교회와 신학을 95개 항으로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특히, 별세한 조상의 구원을 미끼로 교회가 팔아먹던 면벌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인지 밝혔습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과 신학을 잃으면 장사꾼이 되다 못해 사기꾼으로 전락한다는 현실을 고발하고 경고한 일이었습니다.

루터가 가르친 ‘모든 신앙인은 사제’라는 ‘만인 사제직’ 교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큰 오해를 낳았습니다. 이는 ‘너나 나나 사제, 그러니 특별한 사제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서로 기도를 바치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산다는 말입니다.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만인사제직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제가 되어 함께 모인 교회는 세상에 구원을 펼치는 곳입니다.

서로 갈등하는 시대를 살았고 자신도 병고에 시달린 탓인지, 루터의 논리적이고 분명한 주장은 때로 거칠고 사납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 교회는 루터의 깊고 성실한 자기 성찰의 신앙과 신학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오히려 그 사나움과 배타성만 배워서 중세 교회의 타락을 되풀이하여 이제는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Martin-Luther.jp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4년 10년 26일치 (↩)

우리도 천사처럼 –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

Monday, September 29th, 2014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

1.
오늘은 대천사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여러 성인 축일을 없앤 종교개혁자들도 이 축일만은 남겨서 기념했습니다. 이 축일의 연대는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한 미카엘 천사의 이름을 딴 성당을 봉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의 성당에서 이 축일을 기념한 것이 9월 29일입니다. 이때 드린 본기도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는 약간 수정하여 성공회 기도서에 옮겨 놓았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천사와 인간의 직분을 아름다운 질서로 세우셨습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의 자비를 베푸시어, 천사들이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듯이, 주님의 명에 따라, 이 세상에 사는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분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1

성서 희랍어에서는 천사를 ‘앙겔로스’라고 합니다. 영어 ‘angel’ 의 어원입니다. 사신(使臣: messenger)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느님의 메신저, 혹은 사신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천사는 인간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천사에게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경계를 넘나들며 신속하게 움직이는 활동, 무엇인가를 이뤄내는 강력한 힘, 그리고 모든 것을 밝혀 보여주는 빛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예술 작품을 보면, 천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등 뒤에는 날개를 달고, 손에는 칼을 들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날개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움직이는 것을 상징하고요, 칼은 그들이 지닌 엄청난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빛나는 모습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깨달음의 빛을 의미합니다.

성서에는 여러 천사가 나옵니다만, 네 분의 천사만 그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카엘, 가브리엘, 우리엘, 그리고 라파엘입니다. 오늘 축일 이름으로 맨 먼저 나오는 미카엘 천사는 하느님의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천사장입니다. 미카엘 천사는 하느님 백성을 위협하는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는 분입니다. 특별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죽음을 이기고 새 생명을 얻도록 힘을 주는 천사입니다.2

천사는 하늘에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 그 직분입니다. 땅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 그 직분입니다.

Mikharkhangel.jpg
(대천사 미카엘, 13세기, 성 카타리나 수도원)

2.
우리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성서에서 자주 만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왔던 세 사람의 나그네는 알고 보니 하느님의 사신들, 하느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 떠도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천사들은 큰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불임이었던 사라가 자식을 낳으리라는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했고, 하느님의 축복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어 평생 장애인이 되었지만,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라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천사를 통해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시골 아가씨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려준 것도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분입니다.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무덤가에 찾아와서 슬피 울던 세 여인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준 이들도 바로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기쁜 소식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부활의 새 생명을 전해주는 분들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상에 인간으로 왔지만, 천사로 그려지는 한 분이 있습니다. 세례자 성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길을 준비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다가 세상의 권력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세례자 요한을 천사로 그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여러 이콘을 보면, 그는 날개를 단 천사입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을 전하는 메신저였기 때문입니다.

St_John_Baptist_angel.jpg
(세례자 성 요한, 16세기)
3.
올해는 우리 대한 성공회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지 124주년, 그리고 관구로 독립한 지 22주년 되는 해이며, 오늘은 그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대천사 미카엘은 우리 한국 성공회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모든 천사 이야기의 결론은 한결같습니다. 천사의 사명을 환대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자신이 천사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천사로 활동하는 선교 사명을 지녔다는 소명입니다.

교회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잇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질서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늘의 뜻을 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늘의 엄중한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와 정의의 칼을 가지고 세상의 잘못된 것을 베어내는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환부를 도려내는 칼을 지니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그늘을 환하게 비춰야 합니다. 그늘에서 억눌려 숨죽이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따스한 볕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깨달음을 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들로서 우리 모든 신앙인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천사의 선교 사명입니다.

  1. BCP 1549, cf. 성공회기도서 2004 (↩)
  2. cf. TEC, Holy Women, Holy Men, Celebrating the Saints (↩)

교회의 반석 – 순교와 증언의 주교직

Thursday, August 7th, 2014

2014년 8월 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예레 31:31~34 / 시편 51:10~16 / 마태 16:13~23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생각과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일주일 후면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나라에 방문합니다. 우리 성공회도 교황 방한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현수막을 제작하여 내걸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뿐만 아니라, 교구 여러 교회에도 현수막 설치를 격려한다고 합니다. 그 현수막에 있는 문구는 이렇습니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환영합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황의 방문을 기대합니다. 지난 1년 반 전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에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스스로 낮은 사람이라 칭하고,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향한 그의 시선과 행보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싫어했던 이들마저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활동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지난 여름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젊은 사람들 여럿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이 묻더군요. 현 교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외면받는 종교와 교회에 구세주 같은 분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적어도, 천주교를 살리려고 하느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황은 공식 명칭이 아닙니다. 교황이라는 표현은 과장하여 번역된 말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교황을 일컫는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그저 ‘신부’라는 뜻입니다. 교황이라는 말은 종교의 왕, 황제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도 교회의 ‘맏 어른’이라는 뜻에서 ‘교종’(敎宗)이라 불러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의 공식 명칭은 ‘로마의 주교’입니다. 그는 일개 로마 교구의 주교입니다. 그런데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의 위치가 남다릅니다. 두 가지 전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오늘 읽은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 바르요나를 반석(베드로)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채 순교했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섰습니다.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은 그 첫 성당 자리에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건축된 것입니다.

둘째, 로마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행정 체제를 본받아서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로마 역시 서방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는 세계 그리스도교의 맏형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지만, 이런 전통에 따라서, 로마의 주교는 전 세계 교회, 특히 서방 교회의 맏 어른이라고 통합니다. 이는 모든 서방 교회 전통 안에 있는 교회가 인정하는 역사적 신학적 내용입니다. 그러나 맏 어른이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세계 교회를 치리하거나 다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가운데 으뜸’(primus inter pares)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오래된 교회 전통의 원칙입니다.

Welby_and_Francis.jpg

(성공회의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

성공회는 이 전통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우리 성공회의 맏 어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계 성공회의 다른 어떤 교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실 로마의 주교도 그리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오랜 교회 전통을 우리 성공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의 최고 어른이자, 로마의 ‘주교’인 그를 보면서, 우리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되돌아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 예수님의 제자 시몬의 고백을 칭찬하시며,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런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이 선연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 뜻이 너무 깊어서 오늘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본문의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두 가지는 꼭 살펴야 합니다.

첫째, 자신의 경험, 자신의 기도와 통찰, 자신의 언어,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이야기, 풍문, 주입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넘쳐나는 교회 장사꾼의 이야기를 듣지 마세요. 넘쳐나는 기독교 케이블 티비, 설교 방송 등을 듣지 마세요. 대신에, 여러분과 함께하는 신부님들과 더불어 복음을 읽으시고 대화하며 나누세요. 그들이 여러분의 고민과 아픔, 슬픔과 기쁨을 압니다. 그들에게 귀 기울이면서 여러분의 입으로, 여러분의 언어로 고백하세요.

둘째,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축복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직전에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공통된 내용입니다. 오늘 교회에 적용하여 푼다면, 성직, 특히 주교직은 주님의 수난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주교 대부분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순교(martyria)라는 말의 원래 뜻은 ‘증언’입니다. 말과 몸으로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 순교와 선교입니다. 그 순교의 터 위에 교회가 섰습니다. 그러니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세상의 높은 지위가 아니라, 순교할 곳, 묻힐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순교 위에 교회가 섭니다.

Martyrdom_Peter.png
(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순교하는 베드로)

오늘 순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뜻을 되새기고 나서야 우리는 주교직과 사제직과 부제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교직에 관해 성공회 요한 수도회(SSJE) 출신의 마틴 스미스 신부님이 쓰신 글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주교직의 핵심 상징 중 하나는 의자이다. 감독한다는 말, ‘캐시드라’, 즉 주교좌에 앉는다는 말은 앉아서 가르치는 행동에서 유래했다. 선생은 우리가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다. 복음에 빛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라면 주교가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주교가 일에 휩싸인 관리자가 되어 그 사목에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구할 일이다…

주교좌는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목적 요구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근간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현대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앉아 중심을 잡고서 사태를 안정시키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초점을 견지하도록 돕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내게 큰 감화를 주었던 주교들은 모두 아주 잘 앉아 있는 이들이었다. 재빨리 뿌리를 내릴 줄 아는 분들이었다. 특히 팔을 걷어붙이고 탁자에 함께 둘러앉는 분들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태를 구별하여 파악하고 초점을 잡는 분들이었다. 사목자로서 그분들은 사람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간명하게 사목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이 주교직을 보완하는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이다. ‘에피스코포스’는 감독자라는 뜻이다. 조망이 유리한 위치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큰 맥락을 살피고 특수한 처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사회와 조직의 흐름이라는 좀 더 큰 상황에 연결한다는 말이다. 좀 더 넓은 안목을 갖는 것이 주교직에는 본질적이다. 그리하여 곤란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큰 그림과 명령,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위해 기꺼이 우뚝 서야 하는 직분이다. 지엽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주교가 되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앞을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좀 더 멀리 보는 이를 부르신다. 반대와 분노에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더 넓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되새겨주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를 부르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어떤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