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존 키블 – 신앙 쇄신과 교회의 책임

Saturday, July 28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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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블 – 신앙 쇄신과 교회의 책임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대한성공회 <1999년 시험예식서>는 우리 기도서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꾀했지만, 그 제안이 너무 과감한 탓에 외면받고 말았다. 애석한 일은 그 안에 담으려 했던 신학과 신앙의 고민마저 덩달아 묻히고, 성공회 전통의 균형감 있는 회복 노력도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교회력 개정 제안은 성공회 신앙의 넓은 특징을 아울러, 복음주의, 성공회-가톨릭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전통을 대표하는 성인을 넣으려 했다. 이에 따라 각각 존 웨슬리, 존 키블, F. D. 모리스를 올렸으나, 무슨 연유인지 <2004년 기도서>에는 존 웨슬리만 들어갔다.

존 키블(John Keble, 1792-1866) 신부는 19세기 이후 성공회 전통을 새롭게 쓴 ‘옥스퍼드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이 운동은 그가 1833년 옥스퍼드대학교 채플에서 ‘국가의 배교’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 교구 수를 크게 줄이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키블과 동료 성직자들은 이 처사가 국가 권력이 함부로 교회의 권한을 침해하고 신앙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 설교는 복잡한 정치 배경을 살펴야 한다. 요약하자면,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국가 권력 위에 있으며, 교회는 복음의 가치로 세속 권력의 방향을 비추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영국의 국교 체제가 교회에 드리운 그늘을 벗어나, 성사인 교회의 독립성을 선언하고, 교회의 바른 전통과 실천에 따라 신앙 쇄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깊은 성찰과 용기가 맞물린 그의 외침에 많은 성직자와 신자가 반응했다. 교회는 역사의 바른 신앙 전통과 질서, 신학과 교리를 되살려서 사회를 이끌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교회와 정치의 관계 방향도 새롭게 조정했다. 이런 주제들에 관하여 성실한 연구와 쇄신의 주장이 소책자로 발행돼 널리 읽혔다. 옥스퍼드 운동을 ‘소책자 운동’(Tractarian Movement)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옥스퍼드 운동에서 뉴먼(Newman)이나 푸지(Pusey)가 아니라 키블의 축일을 기념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뉴먼은 신학의 지적 전통 회복에 힘썼으나 곧 천주교로 넘어갔고, 푸지 역시 천주교에 기울어진 신심 생활 강조가 과도했다. 키블은 자신의 신학 능력과 문학적 재능을 곁들여 성공회 사목 활동에서 이 운동을 꽃 피웠다. 그는 대학의 문학 교수로 짧게 재직한 이후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현장 교회 사목자로 평생 살았다.

키블은 이미 <교회력 – 절기와 축일 주제에 따른 시집>(The Christian Year, 1827)을 출간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전통이 마련한 ‘그리스도의 시간 살기 계획표’인 전례력에 따라 성서를 읽고 전례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이다. 이 시집에서 따온 가사로 만든 수많은 성가는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가집에는 하나 밖에 없다. 어느 시편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새로운 아침은 모두 사랑이라네 / 우리가 눈 뜨고 일어날 때 밝혀지듯이 / 잠과 어둠을 넘어 안전하게 다가온 사랑이 / 우리의 삶과 힘과 생각을 회복하나니. // …

사소한 것들과 공동의 임무가 /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의 처소를 꾸며 주리니 /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방이 아니라 / 우리를 매일 하느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길이나니”

  1. 성공회신문 2018년 7월 28일 치 (↩)

[전례력 연재] 숫자의 상징과 신앙생활

Saturday, July 1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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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상징과 신앙생활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그리스도교 안에서 숫자는 여러 상징으로 쓰이고 다양한 뜻을 지닌다. 숫자 자체는 뜻이 없지만,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드러내는 의미로 쓰였다. 수는 달력과 셈법처럼 생활에 밀접하다 보니, 신앙의 뜻을 더해 중요한 일을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서의 숫자 상징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따라 새롭게 배열하고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

뜻을 붙이기에 따라 모든 숫자가 의미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대표 숫자 상징은 1, 2, 3, 6, 7, 8, 40, 50 등이다.

일 (1) – 첫 시작과 기원을 뜻한다. 성서에서 창조의 시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는 다른 ‘잡신’을 넘어선 유일한 하느님을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뜻한다.

이 (2) – 성서에서는 대립하는 여러 성격과 사건을 비교할 때 쓰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에 자주 쓰였다. 제대에 촛불을 두 개 올려놓은 관습과도 관련이 있다.

삼 (3) –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한다. ‘삼’은 고대 사회와 종교, 철학과 수학 등에서도 자주 쓰여 ‘온전한 완성’을 뜻한다. 성서의 사용은 더 다채롭다. 예수 변모 사건을 증언한 세 제자, 그리스도의 십자자 수난 세 시간, 셋째 되는 날의 부활을 생각하게 한다.

육 (6) –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이 만들어진 날의 숫자다. 그 탓에 인간과 그 연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 연약함이 자기중심으로 흐르면 큰 악이 된다. 묵시록에 나오는 악의 숫자 ‘666’이 그것이다.

칠 (7) – 삼(3)처럼 완전함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창조가 완성된 날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위 예수의 일곱 말씀, 성령의 일곱 열매를 말할 때도 쓰인다. 역사에서 마리아의 일곱 슬픔과 인간의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목록에도 쓰인다.

팔 (8) –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팔’은 새로운 시작이다. 시간은 과거 역사의 쳇바퀴인 일(1)로 돌아가지 않는다. 부활은 새로운 시간, 새로운 창조인 탓이다. ‘팔’은 구약에서도 할례 날짜로도 쓰였지만, 신약 이후 ‘새로운 할례’인 세례의 뜻으로도 변화했다. 세례대나 세례당을 팔각형으로 만든 이유이다. 전례력에서 대축일을 작은 절기로 지키는 ‘팔일부’도 여기서 비롯했다. 또한, 팔은 칠 더하기 일(7+1=8)이라는 셈법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부활 은총은 기존의 완전함(7)에 하나를 더한 풍요로움을 드러낸다.

사십 (40) – 시험과 고난을 상징한다. 이 숫자는 성서에 빈번히 등장한다. 사십일 밤낮 비와 홍수,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모세의 시나이산 사십일 거주,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 사십일 생활 등이다. 여기서 사순절의 절제와 극기 관습이 나왔다.

오십 (50) – 부활의 완성과 새로운 몸의 탄생이다. 부활절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에 이르는 시간이다. 부활은 성령 하느님이 내려서 신자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만드는 일로 완성된다. 구약의 희년(50년마다 해방과 안식) 사상을 이어받았다. 예수의 부활은 이제 교회가 예수의 몸이 되어 세상에서 펼치는 희년 실천이라는 말이다. 다시 여기에 사십 더하기 십(40+10=50)의 셈법이 등장한다. 부활은 고난보다 더 길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별세를 불교 관습의 49재가 아닌 부활의 50일째 자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7월 14일 치 (↩)

오래된 미래 – 성공회

Sunday, June 2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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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성공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성공회신학)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라는 책은 1991년 출간되어 현대인의 삶에 깊은 성찰을 제시했습니다. 히말라야 자락 ‘라다크’ 사람들의 전통과 변화를 살피며 새로운 삶의 대안을 고민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자주 잊거나 잃은 가치를 되새겨 줍니다. 불행하고 절망하는 삶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를 넘어서는 방법에 관한 고민과 지혜를 나누려 합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의 지혜 안에서 생태 친화적인 공동체로 살았습니다. ‘전통’은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며 터득한 선조의 지혜와 가치입니다. 세대 간 협력과 공동 소유, 검소한 생활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관광 개발이 시작되어 실제로 생활 편의는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더 가난하다고 느끼고 공동체 문화도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현대화의 홍수에 몸을 맡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전통의 가치와 현대의 흐름을 새롭게 접붙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래된 미래’는 성공회의 전통과 고민에 딱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공회 신자이자 예배학자로서 개신교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로버트 웨버 교수가 이 말을 교회와 전례에 적용해서 반성을 이어갔습니다. 교회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예배와 신학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변화에만 눈을 돌렸습니다. 전통을 시대와 관습에 가두어 기득권을 휘두르는 세력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근거와 성찰의 거울이 부족한 채 시도하는 ‘새로운 변화’는 매혹적일지 몰라도 자주 위태롭습니다. 교회를 성사(sacrament)와 역사의 실체로서 살지 못하면 친목 단체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개혁과 대안의 실상이 의도와는 반대로 개인주의와 영성주의로 미끄러지는 이유입니다. 그 결말은 대체로 종교 상품화과 소비주의입니다.

성공회는 신앙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초대교회 전통에서 길어 올린 예배와 신앙의 가치로 사려 깊게 자신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교리에만 얽매이지 않고, 현대 학문에서 배우고 대화하며 오늘의 문제들과 정직하게 씨름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예배는 오랜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켜켜이 쌓인 역사를 전례 안에서 체득하고 음미하여 새로운 시공간을 상상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교리와 신학은 신앙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려고 정직하게 흔들리며 배웁니다. 그 흔들림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와 배움 안에 모인 사람들이 부족하나마 함께 모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미래인 성공회는 당장 시원하지만 갈증만 더하는 ‘사이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은 정직한 생수를 나누려 합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생색내기 성과로 사람을 탈진하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 곰삭아 빚어진 맛과 영양의 잔치를 널리 나누려 합니다. 음식을 내는 오래된 그릇이 조금 답답하고, 시중드는 걸음이 흔들려 조금 못 미더워도, 서로 받아주고 견디어 순례의 잔치를 이어갑니다.

오래된 미래의 잔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1.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복음닷컴 2018년 6월 24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