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

Friday, July 25th, 2014

여성 성직, 성공회, 하느님의 선교1

“영국 성공회, 여성 주교 성품 가능!” 최근 우리나라 언론도 ‘영국’ 성공회에서 여성 주교 성품이 법제화되었다는 소식을 앞다투어 전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영국 성공회 480년 만에 여성 주교 허용”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더 들춰보면 정확하지 않고 여러 편견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째, 성공회는 ‘480년 전’에 시작된 교회가 아닙니다. 원래 하나였던 그리스도교회는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이후 하나로 유지되던 서방교회는 다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다른 교단이 이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보든, 성공회는 기원을 초대 교회와 그 선교 역사의 경험에 둡니다. 성공회는 말 그대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둘째, ‘허용’이라는 말은 편견에 사로잡힌 표현입니다. 여성 성직은 누가 누구에게 허용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여성은 허용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듯이, 여성 성직은 허용받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억지로 금했던 역사가 모자라거나 잘못됐고, 이 잘못을 깨달은 여성과 남성 신자, 성직자들이 오래도록 잘못된 벽을 허물어 더 풍요로운 이해에 다다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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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성공회 주교회의 람베스 회의에 참석한 여성 주교들)

이번 ‘영국’ 성공회의 여성 주교 성품 법제화는 ‘영국’ 성공회의 많은 신자, 특히 여성들이 오래도록 바라며 분투했던 일이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더욱이 사제직뿐만 아니라 주교직에도 막힌 벽을 헐어서 여성과 남성, 인간 전체를 향한 하느님 은총과 소명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세계 성공회 역사 안에서 여성 성직을 이끈 교회는 아시아의 홍콩 성공회였습니다. 1944년 홍콩 성공회는 리 팀 오이 부제를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억지로 막은 담이 허물어진 뒤, 1970년대에 다시 홍콩, 미국, 캐나다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이 잇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2001년 민병옥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아 여성 성직의 길을 열었습니다.

1988년에는 미국 성공회에서 ‘흑인 여성 사제’ 바바라 해리스가 세계 성공회 첫 여성 주교로 성품받았습니다. 세계 성공회 관구의 절반 이상은 사제직에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주교직에서는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스코틀랜드, 호주가 성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여성 주교는 20여 명에 이릅니다. 이제는 ‘첫’ ‘여성’ ‘흑인’ 등과 같은 수식어를 모든 성직에서 없애야 할 때입니다.

여성 성직을 반대하는 정교회와 천주교 등과 나누는 일치에 문제가 생긴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더욱이 주교직은 남성 제자들을 통한 사도적 계승의 한 표현이며, 교회의 일치 수단이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성공회도 교리와 전통을 나누는 일치를 추구합니다. 동시에, 다채로움을 포용하고 초대하는 실천으로 일치의 자리가 더 넓어지고, 예언자적 행동으로 교회의 전통이 풍요로워진다고 믿습니다. 이 너른 일치와 풍요로운 전통은 교회의 선교를 더욱 든든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교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성직은 든든한 선교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1. 주낙현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7월27일자 주보에 실은 글(↩)

토착화 – 우리의 현장과 선교

Saturday, July 19th, 2014

토착화(土着化) – 우리의 현장과 선교1

성공회 강화읍 성당은 우리 성공회가 자랑하는 신앙과 문화의 유산입니다. 불교의 사찰과 유교의 향교 건축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 아름다운 성당으로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우리 서울 주교좌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서양 건축이지만, 곳곳에 우리 전통과 문화의 아름다움이 녹아들어 장엄하고도 따뜻한 신앙과 전례의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이 두 성당을 토착화의 한 열매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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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를 건물에만 제한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토착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한 인간의 삶과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내려 자라나고 펼쳐지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신앙과 신학이 ‘토착화 신학’입니다. 복음의 토착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시어 인간 예수로 오신 성육신 사건에 뿌리를 둡니다.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문화 속에서 활동하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토착화의 근거입니다. 토착화는 역사를 향한 복음의 증언인 선교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토착화의 의미를 넓고 깊게 물으면, ‘상황의 신학’ ‘현장 신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심은 신앙과 신학을 넘어서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상황과 맥락과 현장 안에서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토착화 신학이 돋보이는데, 민중신학과 종교문화의 신학이 그것입니다.

민중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사회와 정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 응답하는 신학입니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의 사회 정치적 억압과 격동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추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에 집중하며 성서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종교문화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한국의 종교와 영성이 만나서 대화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선교사보다 먼저 오시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깊이 깨닫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이미 펼쳐진 영성의 경험과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서로 비추면서 복음의 뜻을 더 깊이 헤아립니다.

일찍이 신앙과 복음의 토착화에 남다른 식견을 보여주었던 우리 성공회에는 이제 어떠한 현장의 신학과 선교가 필요할까요? 한국 사회 속에서 복음의 작은 씨앗을 품은 우리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키워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나무에서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다시 맺을 수 있을까요?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4/07/20에 실은 글.(↩)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

Thursday, June 26th, 2014

환대 – 신앙과 교회의 근본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0-42).

종종 편안하게 기대어 안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종교 경전에서 멋진 한 두 구절을 만나 마음을 위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거기다가 약속된 상까지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이런 사람 마음에 관하여 몹시도 단호한 선언을 던집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말씀 자체인 예수님의 삶과 그 도전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허투루 듣기 어렵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당부하시며, 그 선교 활동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를 염려하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그 당부와 염려와 격려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예언자와 옳은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그에 따른 보상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 신앙은 예수님을 환대하고,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환대하는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름 아니라, 예언자와 정의로운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환대하는 행동이 신앙이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참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과 교회가 참된 신앙의 공동체인지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현실의 교회 안에 예언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정의로운 사람이 발을 붙이고 있는지, 보잘것없는 사람이 환대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예언자로 살아가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작은 사람으로 겸손히 살아가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언자는 못 배웠거나 천한 신분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을 가진 사람들, 특히 종교와 정치의 여러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용기 있게 쓴소리를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대하기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교회는 썩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혼자서 이루는 옮음과 정의는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는 늘 공동체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공평한 대접과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를 에둘러서 정의를 말할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건물의 초석이 어긋나면 아무리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도 곧 위태로운 처지에 빠집니다. 교회는 이런 정의와 올바른 절차를 지키고 훈련하며, 교회 밖의 사회를 정의롭게 물들여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때라야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은 말 그대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이방인, 재력과 지위가 딸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 대접에 고마워할 정도로 관심과 배려와 환대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찾으며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친 신앙의 나그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환대하고 쉼터가 될 때라야, 교회는 참된 희망터가 될 수 있습니다.

Trinity_Icon_Hospitality.jpg

(러시아 정교회 이콘 – 삼위일체 –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우리 교회 안에서 이들을 환대하고 있나요? 이들은 우리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 괜히 풍파를 일으키는 얼치기라는 핀잔을 받고 있나요? 우리는 이처럼 예언자이고 정의롭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도대체 하느님에게서 어떤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1. 성공회신문 6월 28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