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

Saturday, March 31s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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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 역사의 기억으로 연대하는 교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아멘.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이 시간 이 공간에 당도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이고 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시작했던 길이었습니다. 극기와 절제, 기도와 봉사로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끝에 우리는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우리 발을 씻겨주시는 은총을 경험하고,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양식으로 베푸시는 마지막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셨던 한 청년이 정치와 종교 권력의 시기와 모함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장면을 멀리서,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때로는 비겁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절망 속에서 말입니다.

세상이 승리와 성공을 자축하며 자만감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의 영은 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해 침묵의 무덤에 갇힌 모든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성 토요일은 어두운 침묵과 희망 부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된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려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밤을 목격했던 세 여인처럼, 우리는 역사 안에서 부활을 새롭게 목격했던 성공회 신자 세 명의 음성을 만나려 합니다. 그들이 남긴 증언 속에서 부활밤에 담긴 아픈 상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희망과 치유를 나누려 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20세기 영미 시단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이라 불렸던 T.S. 엘리엇을 만납니다. 그는 연작시집 <황무지>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무슨 일 때문에 시인에게 4월은 그토록 잔인한 달이었을까요? 시인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생각했습니다. 병사만 9백만 명, 민간인 1천 9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 탓에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4월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너무도 깊고 아픈 상처가 어린 시간입니다. 4월 3일, 4월 19일, 그리고 여전히 가슴 저며오는 4월 16일. 신앙인은 우리 삶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은 고된 삶의 여정과 동행 속에서 얻은 상처 위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과 나눔, 희생 사랑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두 번째 인물은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 신부입니다.

“그 누구도 섬처럼 떨어진 사람은 없나니,
인간은 하나인 전체요, 한 사람은 그 대륙의 한 부분일 뿐이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나니.”

17세기 영국 사회를 살았던 존 던(John Donne) 신부의 설교 한 대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제목이 되어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스페인 민중은 물론, 헤밍웨이 자신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던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군사 쿠데타 세력과 싸웠습니다. 소설가는 모든 사람이 불의에 저항하는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의 전쟁 경험에서 존 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삶에 이뤄야 할 사랑과 정의와 자유는 어느 사람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동떨어진 남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돕고 연대하여 이뤄내야 해야 할 하느님의 일입니다.

존 던 신부 자신은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통을 통해 들여다보고 깊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한 인간과 그 생명은 뿔뿔이 흩어진 개체가 아닙니다. 그 한 인간 자체로 온 창조 세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입니다. 역사와 현실의 교회는 뿔뿔히 흩어진 생명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례에 초대하여 먹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을 축복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전례와 성사를 그 행동으로 삼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둠을 깨뜨리며 울려 퍼진 부활의 종소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의 세례를 받아 여기에 모인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라고. 한 몸인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놓인 존재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정의와 자유를 함께 축하하며 누려야 한다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시작이었던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활의 증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입니다. <생쥐와 인간>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인벡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신앙인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놀라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모르며,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인공 톰 조드는 권력에 쫓기는 몸이 되어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아이고, 내 아들아, 이제 너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냐?”
어머니의 애타는 물음에, 톰 조드는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엄마, 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어떤 사람을 때리는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거기서 나를 찾으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예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남녀의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의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오늘 여러분은 무덤가를 찾은 세 여인과 더불어,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바라보았던 세 명의 성공회 신자와 함께 부활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는 기억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호흡에 담긴 하느님의 숨결을 믿고, 그들과 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절망이 어둠처럼 지배하는 시간에도, 진실이 가져다주는 희망으로 세월을 견디며 세상의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불꽃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세례받는 이들과 함께 그 빛을 나누어 가지며,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는 행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악은 사라지고 죄가 씻어졌으며, 죄인에게는 용서를, 우는 이에게는 기쁨이 펼쳐지는 밤, 교만과 미움을 쫓고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주는 밤”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8년 3월 31일 부활밤 전례 강론 []

[전례력 연재]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Sunday, February 11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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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기도서에 적힌 <병자를 위한 기도일>(2월 11일)은 낯설고 새롭다. 전례 색깔도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한다. 교회마다 주일 전례나 매일 기도 때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왜 이날을 따로 정했을까? 어떤 달력은 좀 더 세심하게 ‘세계 병자의 날’이라 적기도 한다. 건강 관련 세계 단체가 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축일은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제정하여,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다른 교단과 사회 단체에 널리 퍼졌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교회력에 넣은 교단일 테다.

교종은 이렇게 부탁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자신도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12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연유도 있다.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겹친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께서 세 번이나 나타났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일의 연원에서 세 가지 뜻을 살핀다.

첫째, 이날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다. 고통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부탁이다. 무슨 말인가? 종교는 종종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너무 쉽게 말한다. 성서에도 치유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전통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고통에 관한 깊은 생각으로 초대한다.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치유 기적 핵심에는 측은지심과 축복이 있다. 병약자들이 소외당하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병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선언한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축복하시고 그 가치를 새롭게 선언하신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이다. 기도일을 제정한 교종도, 성모 발현의 복된 증인인 소녀도 결국 죽음을 맞았다. 교종은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녀는 수녀가 되었지만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모두 죽었다. 오래 사는 사람은 있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병에 들든지 건강하든지 우리는 모두 죽는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앙인은 이 시차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는 큰 안타까움이지만,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진다.

셋째, 사람은 잊어도 하느님은 잊지 않으신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든지 길든지, 생명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히는 일이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니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이다.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이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뜻이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10일 치 []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Sunday, August 13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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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걸으며 (마태 14:22-33)

희망은 고난으로 단단해집니다. 신앙은 풍파로 흔들리는 삶의 진실 안에서 자라납니다. 믿음은 여리고 아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성큼 다가옵니다. 삶의 상처는 쓰라려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세상의 아픔까지 헤아리게 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신앙의 은총은 여린 상처 안에서 조용히 솟아오르려 꿈틀거립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다는 오늘 복음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을 흔드는 상처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참담한 죽음 탓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뱃속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던 사이였습니다. 두 분은 세례로 연결되었고, 요한이 갇히자 예수님께서 세상 전면에 나서셨습니다.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이 처절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주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 속에서 요한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홀로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과 배고픈 이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의 처지가 마음 아팠습니다.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슬픔의 눈길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며 펼치신 성찬례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으로 몸부림치며 성취를 향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서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희망과 신앙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기대와 달리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안에서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우리를 넘실거리며 위협하는 파도는 절망과 상실의 눈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삶의 고난과 상실을 잊으려 하고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삶의 무게가 파도가 되어 그를 두렵게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에 눈을 팔 자,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신앙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