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전례의 색깔 – 원칙인가, 역사인가?

Saturday, April 1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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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의 색깔 – 원칙인가, 역사인가?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색은 전례력의 주제 변화에 따른 여러 색깔을 말한다. 제대에 예복 등에 색깔을 써서 시각적으로 전례의 뜻을 도드라지게 하려는 뜻이다. 전례색의 사용은 오랜 역사가 있는 만큼, 그 적용과 의미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우리가 쓰는 ‘전례색 사용 원칙’(기도서 28쪽 이하)도 불변하는 원칙이라기보다는 한국성공회가 전례 안에서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려는 ‘권장 사항’이다. 그러나 교회 일치에 관한 감각을 높이려는 뜻을 존중하고 따라야 마땅하다.

유쾌하든 불쾌하든,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전례색이 시작됐다. 로마 황제가 세례식에 쓰라고 주교에게 하사한 금술 달린 예복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유대교 전통을 따라서 ‘탈리트’를 쓰는 관례가 전부였으리라 추측한다. 4세기 말부터 성찬례 집전자는 흰색 예복을 입었다. 이후 9세기까지 서방교회는 다양한 전례색을 사용했으나 꼭 정해놓은 법은 없었다. 동방교회는 지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정교회는 절기 관계없이 지금도 주일에 항상 금색을 쓴다.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인 탓이다.

13세기 시작 무렵부터 서방교회의 전례색 기본이 마련됐다. 백색은 주님의 모든 축일과 모든 성인의 날에, 홍색은 성령강림절과 성십자가 축일, 그리고 사도와 순교자 축일에, 흑색은 절제의 절기와 별세자의 날에, 그리고 녹색은 그 밖의 날에 사용했다. 나중에 흑색은 대림절과 사순절 동안 자색으로 바꿔 색깔을 약간 완화했다. 이 기본 색깔을 중심으로 지역에 따라 변화도 생겼다. 대림절에 청색을, 사순절에 회색을 쓰는 중세 영국의 ‘사룸’ 예식서였다. 성공회에서는 19세기부터 ‘사룸’ 예식의 전통을 복원하여 전례 행동과 전례색에 변화를 주려고도 했다.

정교회는 나라와 전통마다 여전히 전례색 사용이 조금씩 다르다. 천주교는 복잡한 전례색 사용을 1969년의 전례 총지침으로 개정했다. 이후 성공회뿐만 아니라 여러 개신교회도 천주교의 개정 전례색을 조금씩 고쳐서 사용한다. 같은 서방 교회 전통이니 큰 문제가 없지만, 오랜 관습 때문에 수용과 적용에서 조금 혼란을 겪기도 한다.

한국 성공회의 <1965년 공도문>과 <2004년 기도서> 사이에는 전례색 사용에 조금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공도문>은 칠순기간(부활 70일 전)에 자색을 쓰라고 하지만, <기도서>는 사순절에 자색을, 성주간에는 홍색을 쓰라고 한다. 큰 혼란은 성목요일이다. <공도문>은 ‘건립성체일 미사’에 백색이라고 적었지만, <기도서>는 홍색 사용을 지시한다. 올해도 교회마다 혼란스러워하면서 무엇을 쓸지 옥신각신했는지 모른다. 세계성공회 여러 교회도 조금씩 다르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여러 관구는 백색을, 미국과 다른 관구는 홍색을 지시한다. 신학의 강조점이 살짝 다른 탓이다. 백색은 성찬례 제정과 사제직에 초점을 두지만, 홍색은 그날 세족례와 최후 만찬이 수난사의 일부라고 강조한다. 옳고 그름이 아니니, 그 초점에 따라 교회마다 해마다 다르게 해도 좋겠다.

대림절의 청색 사용은 권장할 일이다. 대림절의 주제는 사순절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하늘을 향한 기대와 아기 탄생의 희망이 청색에 담겨 있다. 흑색 사용은 여전히 유용하다. 성금요일의 흑색(어둠과 죽음)과 홍색(수난의 피)의 교차 사용이나 혼용은 그날 주제를 더욱 부각한다. 상장예식에서도 빈소를 지키는 동안에는 흑색을, 발인 이후의 예식을 백색을 사용하여 죽음과 부활의 변화를 드러낼 수도 있겠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4월 14일 치 (↩)

신앙의 덫, 닻, 돛

Sunday, October 2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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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덫, 닻, 돛 (마태 22:15-22)

마음에서는 하늘과 이상을 꿈꾸더라도 몸담은 현실의 유혹과 갈등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늘과 땅의 경계 안에서 항상 흔들리며 삽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하늘의 신앙을 확신하며 세상을 초탈했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풍파에 흔들리는 마음의 연약함을 악용하여 신앙의 덫을 놓는 협잡꾼이 세상에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종교 공동체에도 교묘한 논리와 산뜻한 입발림으로 함정을 파거나 근거 없는 뒷말로 신뢰를 흩어버리는 행태가 적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안녕을 미끼로 친 덫을 식별하고,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하느님께 붙들어 매는 신앙의 닻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바람을 따라 돛을 올려 신앙의 순례를 계속합니다. 말과 발음처럼 혼동하기 쉬운 신앙의 덫과 닻과 돛을 식별하는 신앙이 간절합니다.

– 한 사람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이 위선의 야합을 만듭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주의자 바리사이파와 로마 제국의 앞잡이인 헤로데 당원이 협잡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공동의 적이 생기면 그동안 적이었던 사람도 친구로 변합니다. 적과 친구를 정의의 잣대로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바꿉니다. 이들의 합동작전이 아침에는 잠시 성공할지 몰라도, 저녁에는 서로 배신하여 물고 뜯고 맙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나 정치 행태가 이와 같아 안타깝습니다. 트집을 잡고 덫을 놓으려는 행태는 머지않아 자중지란에 빠집니다. 신앙인은 이 애처로운 일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 신앙인은 세상 풍파의 출렁임에 의연합니다. 우리 삶이 흔들린다 해도 깊고 굳건한 바닥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풍파를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이 표류하지 않게 하는 근거입니다. 신앙인은 흔들리는 삶을 오히려 더 큰 파도를 넘는 훈련과 준비로 삼습니다. 더 깊고 큰 하느님에 기댄 사람은 세상이 유혹하려고 뿌리는 거짓 선전과 선동에 귀와 입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분명히 식별하여, 처세와 지위로 위장한 거짓 권력마저도 끝내는 하느님의 더 크신 권위 아래 복종한다는 진실을 확인합니다.

– 풍파를 넘은 항해로만 우리 신앙은 성숙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례는 그리스도의 삶이 역사에 불어넣은 바람을 타고 전진합니다. 모함을 이기고 정의를 세우며 사랑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바람을 온몸에 받는 돛을 높이 세웁니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바람 방향에 돛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 안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신앙의 배움과 전례로 단련된 근육으로 노를 저어나갑니다. 이 풍파의 바다를 피하거나 우리의 수고를 다하지 않고서는 전진은 없습니다. 신앙인은 카이사르라는 세상의 풍파 위에 하느님의 항로를 그려내며 살아갑니다. 교회의 임무이며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Sunday, October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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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마태 22:1-14)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와 그 생명을 함께 축하하고 즐기라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와 경제는 이 초대를 자주 위태롭게 합니다. 울타리를 치고 몇몇이 독식하거나 갖가지 인맥과 이권이 만든 차별의 벽을 높이 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맞서 하느님의 잔치를 이어가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흥을 이어가시려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시고, 배고픈 이들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 배부르게 먹고 남도록 풍성히 차려 주십니다. 세상 기준으로 손가락질받는 이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는 일로 기꺼이 그들의 동료가 되십니다. 그 잔칫상은 자신의 몸을 제자와 친구에게 내어주는 일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축하하는 부활 잔치의 성찬례로 완성됩니다. 난해한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는 이 맥락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초대하려는 의지마저 돋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참여하여 누릴 잔치의 흥을 깨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사적인 성취와 손익 계산에 따라 참여를 거부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초대가 사적인 이익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판단하여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앙은 손익계산을 넘어설 때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최근 세계의 정치경제, 그리고 우리 주변 상황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새로운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꿀 때 희망이 열립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할 것 없이, 모두 생명 잔치의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하느님의 단비가 차별 없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참여했다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을 벗어나 신앙의 길에 초대받는 은총을 누렸다면, 자신에게 친숙한 세상의 관습을 버리고 신앙과 은총의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에 둘러 모인 사람은 나이와 성별, 학력과 재력, 오래된 이와 새로운 이의 구분을 넘습니다. 사람따라 존대하거나 친근하다는 빌미를 대며 반말로 하대하지 않습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며, 서로 좋은 것을 권하고 보살피는 예법을 따릅니다.

신앙 공동체는 성찬례로 하느님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나눕니다. 세상의 삶이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의 공간과 시간에서만은 새로운 행동과 예법으로 살며 훈련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손님인 사람이기에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예법을 무시하는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는 한탄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생명의 기쁨을 서로 축하하고 서로 드높이며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 생명 존중의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