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Sunday, August 2nd, 2015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요한 6:24~35)1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를 물으면 각양각색이지만, 자신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와 의문에 대답을 주십사 하는 소망이 많습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안녕과 성공, 가족의 건강과 축복은 당연한 일이고, 내세에도 안녕과 축복이 계속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이 갈망의 해결 방식을 되새겨 보면, 인간은 요청하고 하느님은 베풀어 주신다는 공식입니다. 구약시대 모세 때도 같았습니다. 괴롭다고 소리치니 파라오의 압제에서 건져 주었고, 배고프다가 아우성치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불평과 더 큰 것을 바라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하루 지나 썩듯이, 인간의 욕심은 마침내 황금소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일로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다릅니다. 자기가 소망하는 대로만 받은 것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실제로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 예수님을 “생명의 빵과 물”로 받아들이면 ‘영원히 계속되는’ 새로운 일이 펼쳐집니다. 불가능하다고 세상이 내치거나 버린 일을 다시 되새겨서 받아들이고, 그 일에 온 마음을 두고 온 몸을 던질 때 하느님 나라가 열린다는 장담입니다. 모세 앞에서 불타면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떨기나무 사건이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나다”라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것 속에서 하느님의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나다”하셨던 하느님의 어투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쓰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요, 착한 목자이며 포도나무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부활과 생명이다.” 어느 말씀 하나도 현실의 세상에서 통용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의지와 실천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삶 전체는 욕심과 경쟁의 어둠에 잠긴 세상에 빛을 주고 새로운 길을 냅니다. 서로 마음의 벽을 쌓은 세상에 문을 트고, 버려진 사람을 찾아내어 보살피며 달고 단 포도를 한 움큼 입에 넣어주시며 기운을 일으킵니다.

오늘 “나는 생명의 빵이다”하신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너는 무엇이냐? 너는 누구이냐”는 물음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로 세상을 비추고 보살피고 먹이셨다면, 우리 신앙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느냐는 도전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소망에 머물지 않고, 더 큰 희망과 진실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believe in). 믿음은 예수님의 삶 ‘안’에 들어와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를 몸소 보여주시려고, 영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이신 성체와 보혈이 먼저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권면대로,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그분의 삶 ‘안’에 들어가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직분의 은총과 선물대로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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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2일 연중18주일 주보(↩)

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

Saturday, April 4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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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 성공회신학 / 서울 주교좌 성당)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요한의 이 아름다운 환시는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인 구원 사건을 축하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라면 성목요일의 세족례와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 사건, 성토요일의 무덤의 침묵, 마침내 부활밤의 부활사건을 연이어 통째로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 거룩한 삼일 동안 인간의 새 창조와 구원이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부활 전례의 핵심입니다. 모든 주일은 부활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주 매시간 부활한 생명으로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천지 창조는 ‘보시기에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점에서 창조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첫 성사입니다. 그러나 인간 아담은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을 잃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와 인간이 서로 누리는 관계도 뒤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처럼 ‘깨진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상태를 ‘죄’라고 부릅니다.

죄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신 하느님께서는 몸소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산고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배를 찢는 아픔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열었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과정에 담긴 사랑과 아픔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일이 바로 전례의 기본입니다. 성삼일은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성 목요일은 새로운 “명령”의 시간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며 세상 안에서, 특히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모본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동안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던 모든 음식 기적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참 생명을 살아갈 인간의 음식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먹을 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주는 공포는 사람의 호흡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간을 멈추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무죄한 고난과 죽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한, 역사는 더 진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힘은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장엄기도’를 드리는 까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연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 토요일은 예수님의 부재로 어두운 침묵이 이어지는 고독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서는 이 무덤 속 어둠의 시간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펼치셨다고 증언합니다. 삶의 어둠과 고독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세운 성안에 갇혀 지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그 어둠 속에서 발견하여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때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부활밤은 새로운 창조가 열리는 시간입니다. ‘새불 축복식’은 어둠의 과거를 살라버리는 놀라운 힘과 더불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고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빛을 선사합니다. 이 불의 연단을 넘어선 우리는 새롭게 구워져서 아름답게 빛나는 도자기와 같습니다. 이 불은 우리 신앙의 열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뜨거움으로 하느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모든 힘에 도전하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삽니다. 부활 오십일 째 되는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교회야말로 부활의 몸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점을 간과하면 ‘몸의 부활’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교회와 신학, 신앙마저도 뒤틀리기 쉽습니다.

부활 성삼일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 응축된 시간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따르는 우리는 작은 부활일인 주일 성찬례를 계속 거행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며 그 몸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합니다. 이 만남과 경험과 참여의 성찬례가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이때라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그 부활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1. 성공회 신문 2015년 4월 4일치 부활절 특집호(↩)

구원 – 오직 사랑만이

Sunday, March 15th, 2015

오직 사랑만이 (요한 3:14~21)1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종교는 사랑을 쉽사리 신의 속성이라고 가르칠는지 모릅니다. 철학은 사랑을 행복의 원리로 말하기도 합니다. 과학은 사랑을 인간 생존본능의 한 표현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속성이나 원리나 분석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와 삶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며 서로 선물로 주고 받는 사랑이기에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거룩한 수고와 숨결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실패가 반복되어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늘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나 사랑에 겨운 나머지 사람은 딴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보살펴 해방을 베푸셨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과 고통을 내세워 변덕을 부리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나뉩니다. 히포의 어거스틴 성인은 두 가지 사랑의 분열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De Genesi 11:15.20).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사랑도 자칫 자신을 향한 좁고 인색한 이기심이 되기 쉽습니다. 종교가 이를 조장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여전히 많은 종교가 자신을 향한 축복을 우선순위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정의와 자신의 축복을 분리하면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마련하여 우리에게 숨결처럼 불어넣어 주신 넓고 깊은 사랑은 인색하고 고약한 자기 사랑이 되고 맙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면 종교의 가르침이 딴 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분열된 사랑이 만드는 단죄와 심판을 거두시려고 예수님은 인간 고난의 극치를 몸소 겪으셨습니다. 무책임한 정치 권력이 그분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았고, 부도덕한 종교 권력이 그분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축복의 결핍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땀과 상처의 피가 새로운 삶의 새싹을 틔웠습니다. 춥고 어두운 땅에 갇혔던 씨앗이 봄(lent)의 빛과 생명으로 돋아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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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는 회개로 사순절 여정을 시작한 우리는 이제 눈을 들어 높이 매달린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세상 곳곳에 퍼진 고통을 느끼고 그 신음을 듣습니다. 사랑의 작품인 우리가 겪는 고통에 안타까워하시며 하느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건네시는 손길에 응답하여, 우리도 하느님 사랑의 동료인 이웃에게 사랑의 눈길과 선물을 건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선물이어야 합니다.

오직 이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15일치 – 수정(↩)